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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헌재, ‘사법정치’를 두려워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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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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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이런 소문이 떠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퇴임(1월 31일) 전에 탄핵심판에 대한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 헌재 관계자에게 확인해 봤다. “박 소장은 최근에 외부 사람을 절대 안 만난다.”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다는 뉘앙스다. 또 다른 관계자는 “박 소장이 명시적으로 임기 중에 끝내자고 한 바는 없다. 하지만 재판관들 사이에는 신속하게 마무리하자는 공감대가 있다”고 전했다. 뭔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탄핵심판, 정치적 의미의 재판
국민과 역동적 대화 반영해야

탄핵심판은 9명의 재판관 중 6명이 찬성해야 ‘인용’된다. 박 소장이 없어도, 오는 3월 13일 퇴임하는 이정미 재판관이 없어도 법적인 하자는 없다. 그러나 남은 7명 중 2명만 반대해도 ‘기각’되는 사태가 국민에게 용납될까. 9명 모두, 적어도 8명의 재판관이 모여 혼돈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박 소장이 ‘의리의 심판’이든 ‘배신의 심판’이든 매듭짓는 게 원칙적으로 옳다고 본다.

시간이 변수다. 그러나 탄핵심판에선 유·무죄를 따지지 않고 대통령이 헌법적 가치를 위배했는지가 관건이다. 헌재의 의지에 따라 시간은 탄력적이라는 얘기다.

‘탄핵심판은 재판인가, 정치인가’라는 의문에 그 해답이 있다. “탄핵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내포된 재판이다”(전종익 서울대 로스쿨 교수). 위법행위가 인정되더라도 ‘중대성(重大性)’이 인정돼야 파면할 수 있다는 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재판(2004년)에서 확립됐다. ‘중대성’이라는 게 뭔가. 고무줄이다. 재판관 개인의 소신과 법리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고도의 정치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재판이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이인호 중앙대 로스쿨 교수). 정치재판이나 여론재판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은 맞다. 그래도 나는 ‘사법정치’에 무게를 더 두고자 한다.

2004년 10월 21일 헌재 대심판정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윤영철 당시 헌재 소장은 “우리나라 수도는 서울이라는 불문(不文)의 관습헌법”을 근거로 노무현 정부의 신행정수도 이전을 봉쇄해 버렸다. 5000년 한국 역사에서 고조선의 아사달, 신라의 서라벌, 백제의 웅진과 사비, 고구려의 평양, 발해의 상경용천부는 왜 수도가 안 되는지 여전히 의아하다. 이 결정은 성문헌법에서 근거를 못 찾자 관습헌법을 끌어들인 ‘사법의 정치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기각, 통합진보당 해산 인용(2014년), 친일파재산환수특별법 합헌(2011년)도 사법의 정치화로 설명된다. 당시의 여론조사 결과는 헌재 판단과 놀라운 일치성을 보였다. 국민의 뜻을 반영한 사법의 정치화는 오히려 빛을 발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재의 재판권도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뿐이다. 헌법은 국민과 ‘대화’하며 발전한다. 2006년 은퇴한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사법부와 국민, 그리고 헌법의 역사는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역동적 대화(dynamic dialogue)의 관계”라고 했다. 사법부와 헌법의 존재는 시대정신에 기초한다는 뜻이리라.

2017년은 헌재 재판관 9명에게 자신의 법관 인생에서 가장 고뇌와 번민에 찬 날들이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파면 여부는 대한민국의 운명과 역사를 가름할 위대한 심판이다. 위법의 ‘중대성’을 찾았다면 재판과 정치 사이에서, 시간의 저울질 사이에서 곡예할 이유가 없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거둬내고 상식과 정의가 숨 쉬도록 대한민국을 리셋(reset)하라는 염원에 재판관들은 신속히 응답해야 한다.

사족.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디선가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가 흘러나온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그런 의미가 있죠/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국정농단과, ‘새로운 꿈’은 새해에 펼쳐질 신세계와 절묘하게 교차한다. 참, 멋진 노래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