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요리 좋아하는 사람들의 순례지가 있다. 어떤 요리사는 주인을 ‘지구 대표 요리사’라고 칭송한다. 그들은 기회만 닿으면 서울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멀다 않고 달려간다. ‘기회’란 예약이 거의 안 되는데 누군가 자리를 확보하고 알음알음 불러주는 걸 말한다. 서울·수도권에서 먹는 것 좀 즐긴다는 사람들이 앞다퉈 동참한다. 먹고 나면 누구나 엄지를 세운다. 중화요리 명인들 중 현역 최고 선배인 곡금초(曲錦超·취진초·64) 사부가 웍을 잡고 있는 동탄 ‘상해루’(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147 돌모루프라자 2층/전화 031-8015-0102)다. 사부(師傅)는 중국어로 기능·기예를 가진, 또는 그걸 전수하는 사람을 부르는 존칭이다. 서구 주방시스템과 비교하면 셰프와 같은 용어로 쓰인다.
지난 18일 점심, 15명이 모이는 자리에 나도 기꺼이 동석했다. 예약한 12가지 요리, 2가지 번외 음식과 식사가 이어졌다. ▷통샥스핀찜 ▷대게살볶음 ▷멘보샤와 굴튀김 ▷총파해삼홍소육 ▷깐풍알래스카대게살 ▷잣전복볶음 ▷기아해삼(오룡해삼) ▷송이토시살볶음 ▷문어 숙회(번외) ▷칠리랍스타 ▷호부추볶음과 꽃빵 ▷물만두(번외) ▷달인 탕수육 ▷식사(건새우고수볶음밥·굴탕면·간짜장·짬뽕 나눠 먹기). 시간이 그렇게 간 줄 몰랐는데 식사가 끝나니 4시간이 흘렀다. 함께 한 ‘상해루 마니아’ 한 사람은 “전설의 손에서 나온 전설 같은 음식”이라고 극찬했다. 맛도 내용도 내가 평가하기 어려운 수준, 감미롭고 황홀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사진으로 내용을 전한다. 값은, 참석자들이 모두 단골들이니까 잘해줬을 것으로 감안해도 결코 비싸다 할 수 없는 액수였다. 서울 유명 음식점의 5~6가지 음식이 나오는 세트요리 가격과 비슷했다.
곡 사부에게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몇 가지쯤 되는지 물었다.
“숫자로 말하기는 어려워요. 나는 정석에 기초한 변칙 조리를 좋아해요. 비안차이(便菜=간단한 반찬, 일상적인 반찬, 늘 먹는 요리)라는 중국말이 있어요. 중국요리의 많은 조리법들을 이리 저리 조합해, 있는 재료 가지고 손님 입맛에 맞게 임기응변을 하는 거예요. 모든 조리법에 능통해야 그런 기술을 구사하지요. 옛날 청요리 집에는 메뉴판이 없었어요. 손님 식성에 맞게 골고루 돌려가며 요리를 준비해줬어요. 정석을 모르면서 비안차이를 하면 돌팔이지만 기초가 확립된 주방장이 하면 가장 훌륭한 코스요리가 돼요. 내가 그런 비안차이를 잘해요.”
모든 재료를 다룰 줄 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음식 재료에 대해 무척 까다롭다. ‘상해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인 ‘달인 탕수육’의 경우를 보자. 지상파 방송의 달인 프로그램에 나가 타이틀을 차지해 그런 이름이 생겼다. 바삭한 식감 때문에 ‘유리막 탕수육‘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고기는 얼리지 않은 돼지 뒷다리살을 쓴다. 얼지 않은 고기는 기계로 자를 수 없다. 일일이 손으로 잘라야 한다. 주방 직원 5명이 40~50분 칼질을 해야 50kg을 자른다. 그걸로 이틀 쓴다.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생고기로 만든 탕수육 먹어본 사람은 냉동육으로 한 거 맛없어서 못 먹어요. 해동할 때 육즙이 빠져 나가거든. 나는 고기 받을 때 손바닥을 대봐요. 도축해 바로 싣고 와서 돼지 체온이 좀 남아 있어야 받지요. 음식은 재료가 생명이에요. 재료가 80%, 기술은 20%입니다. 장사의 비법은 좋은 재료로 음식 맛있게 해 손님 한 사람이라도 더 오게 하는 겁니다. 그게 더 남는 장사예요. 맛있는 음식도 마약 같아요. 중독성이 있어요. 그런 음식을 하려면 재료 알아보는 눈과 그 성질을 알고 거기에 맞게 조리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지요. 재료 다루는 기술이 요리사의 경륜이자 노하우예요.
중국 부자들은 하루 한 마리씩 먹는다 할 정도로 해삼을 좋아해요. 근래 중국에서 동해산 해삼이 인기가 좋아 아주 비싸졌어요. 건해삼 1kg에 70만~80만원 하거든요. 그래서 동해 건해삼을 쓰는 음식점 별로 없어요. 상해루는 씁니다. 소금 뿌리고 찌고 말리고를 세 번씩 해서 만든 건해삼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은 아주 섬세해야 해요. 찌고 불리는 작업을 거듭해야 하지요. 손바닥만한 걸 손가락만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손바닥만하게 복원시키는 건데, 잘못 다루면 다 녹아버리거나 고무처럼 질기게 돼요. 해삼 자체는 별 맛이 없어요. 거기다 향을 입히는 게 중요해요. 오룡해삼을 만든다면, 일단 해삼에 다진 새우 살을 채워 튀겨요. 기름에 파·생강·마늘 넣고 강한 불에 아주 바짝 익혀 그 향이 해삼에 완전히 스며들도록 하죠. 그 다음, 입힌 향을 가두고 속에 넣은 새우도 떨어지지 않고 맛이 배게 전분으로 옷을 입혀 조립니다. 옛 기아자동차 회장이 좋아해서 당시 아서원 지배인이 ‘기아해삼’이라는 별명을 붙여 지금도 전해오지요."
기아해삼은 탕수육·대게살볶음과 함께 그가 잘하는 상해루 요리 3걸(傑)로 꼽는다.
곡금초 사부는 1952년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중국 산둥성 옌타이(烟台)시 무핑구(牟平區)가 고향인 아버지는 20대에 쌀밥을 좇아 무작정 동쪽으로 왔다고 한다. 제물포에 내린 다음 금산에 처음 정착했다. 요리 솜씨가 있어 읍내에 하나뿐인 청요리 집을 일궜다.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당시 청요리 집은 오늘날 중국음식점과는 달랐다. 메뉴판은 없었고 손님의 입맛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서 내주는 식이었다. 시중 드는 여자들도 있었다. 음식점 뒷마당 둘레로 방들이 죽 있었다고 한다. 일대의 유력자들이 모두 단골이었다. 고향이 금산군 진산면인 정치인 유진산도 손님이었다. 꽤 번창했다. 그 무렵 곡 사부가 태어났다. 우연인지 그의 이름엔 ‘금산’의 ‘금(錦)’자가 들어갔다. 돈은 벌었으나 아버지에게는 평생 고치지 못한 고질이 있었다. 노름(마작)이다.
아들이 2~3세 무렵 금산에서 잘되던 음식점을 노름으로 날리고 충북 영동으로 가서 작은 요리 집으로 재기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을 영동에서 입학했던 것만 기억한다고 했다. 영동 생활도 잠시, 다시 노름을 해 서울로 전주로 유랑을 거듭했다. 살림을 돌보지 않으니 아들은 명동 화교학교에서 학비를 면제받는 면비생(免費生)으로 초등과정을 겨우 마쳤다. 졸업 후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수색에 있던 ‘춘화원’에서 처음 중국집 배달 일을 시작했다. 그 집 아들은 화교학교 동창이었다. 철가방이 아니라 목(木)가방이던 시절이다. 비가 오면 배달통이 물을 먹어 한없이 무거워졌다. 성장기인 10대 중반에 무거운 걸 얼마나 들고 다녔는지 지금도 팔 길이가 짝짝이다. 오른팔이 더 길다. 힘 들던 시절이지만 웍을 돌리는 주방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늘 부럽고 해보고 싶었다.
16세 무렵(1967년 전후) 소공동 물만두 집 ‘일품향’으로 진출했다. 홀 일을 맡았다. 그때는 ‘홀 보이’라고 불렀다. 얼마 안 있어 친구의 주선으로 서울시청 앞에 있던 ‘금문도’ 주방에서 일하게 돼 요리에 첫 발을 디뎠다. 돼지고기를 잘라서 부위별로 나누는 게 일이었다. 힘든 가운데서도 불판 쪽으로 시선이 자주 갔다. 2년 가까이 배우고 다시 20세가 될 때까지 소공동 대려도, 무교동 태화관 등으로 돌아다니며 여러 사부의 요리를 곁눈질했다. 21세에 금문도로 돌아와 3년을 일했다. 그 동안 배운 것은 양파 까기, 돼지고기 분해, 채소 썰기, 해물 손질 등 기초교육이었다. 24세에 조선호텔 앞 삼구빌딩에 있던 ‘야래향’에서 드디어 불 앞에 섰다. 처음엔 튀김으로 시작했다. 2년 후 본격 요리를 시작했다.
1970년대 초 금문도 주방에는 왕수선 사부가 있었다. 남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던 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분에게서 기술도 배웠지만 감(感)을 배웠다. 주방에서 전표 정리 담당 보조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솜씨를 배웠다. 웍 음식을 잘하던 분인데, 특히 불을 죽였다 살렸다, 조절에 능숙했다. 예전엔 가스가 없으니까 연탄을 반 쪼개서 화덕에 쌓고 불을 피워서 요리를 했다. 한창 불이 붙으면 너무 뜨거워서 조절이 참 어려운데 그 분은 벽돌 몇 장을 옆에 두고 그걸 화덕에 넣었다 꺼냈다 하면서 불을 다뤘다. 불 조절을 잘 하니까 음식 맛이 좋았다. 지금은 ‘불의 달인’ 소리를 듣는 곡 사부가 불에 대해 감을 잡은 계기였다.
“요즘 사람들 불 맛을 자꾸 얘기하기에 뭔가 하고 먹어봤더니 그건 그을음 맛이지 불 맛이 아니더라고요. 옛날에 그렇게 음식 만들면 사부님들한테 혼났어요. 진정한 불 맛은 화기로 요리의 향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사부’라는 말도 그래요. 요리 실력으로 압도해야 사부이지 음식 한다고 다 사부는 아니지요. 1970년대 우리가 요리 배울 때 중화요리 실력자들은 55~60세 어른들이었어요. 기술도 기술이지만 경륜이 느껴졌지요. 나도 중국음식점 일을 한 지 50년, 요리를 한 지 40년이 넘었어요. 이제 요리에 감이 잡혀요. 예전 어른들의 경륜이 뭔지 알겠어요. 중국 속담에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있는데, 경륜의 중요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경륜이 쌓이도록 내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스승은 신촌 ‘만다린’ 시절의 등비선(미국 거주) 사부였어요.”
27세(1978년)에 명동 ‘지상각’ 주방장이 다쳐서 임시로 주방을 맡았다. 처음 주방장을 맡은 것이다. 주인이 볼 때 음식을 잘하니까 다쳤던 주방장을 내보내고 아예 맡아서 하라고 했다. 장사가 잘돼 너무 힘이 들었다. 1년 반 만에 신촌 ‘만다린’ 조리장으로 자리를 옮겨 2~3년 일했다. 이 무렵, 그러니까 30세 전후에 그는 기술적으로 음식의 기초를 완성했다. 요리 솜씨가 좋으니까 남산 ‘아리산’과 ‘국빈’ 등 고급 중국요리 집에 늘 불려 다녔다.
1983년 문득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숫자 정해진 돈은 받지 말라”고 아버지는 늘 가르쳤다. 그는 ‘好漢不 兼+欠 有數錢(호한불겸유수전)’이라고 한자를 직접 써가며 내게 설명했다. 중국 속담으로 남이 액수 정해서 주는 돈, 즉 월급 받지 말고 제 사업해서 돈 벌라는 말이라고 했다. 포장마차라도 네 장사 하라고 아버지는 가르쳤다. (※정확한 중국 속담은 ‘好漢不爭有數的錢’이다. 사나이라면 숫자 정해진(=적은) 돈 벌지 말고 큰돈을 벌라는 말. 월급 좇지 말고 창업하라는 뜻이다.)
‘내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처음 펼친 곳은 경북 영천이었다. 후배의 누님이 영천에서 가게를 하는데 나이가 들어 접으려 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 ‘국빈’이라는 청요리 집을 열었다. 텃세가 심했지만 음식 맛이 워낙 다르니까 6개월 만에 자리가 잡혔다. 옆 중국음식점 건물 주인은 정문 출입이 난처했는지 건물 뒤로 돌아 주방으로 오가며 먹고 갔다. 그 아들도 그랬다. 육군 제3사관학교가 있는 영천 일대의 유력자들이 단골이 됐다. 돈을 제법 벌었지만 부인은 식당운영 거드느라 고생을 많이 했고, 자신은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동네에서 너무 외로웠다. 이방인의 독자여서 늘 외로움을 많이 타 사람을 좋아했는데 서울 친구들을 만나려면 음식점 문을 닫아야 했다. 5년 만에 사업을 접고 88서울올림픽 직후 서울로 올라왔다. 영천서 번 돈으로 회현아파트를 샀다.
몇 년간 하림각·가야성·연경 등에서 숫자 정해진 돈[有數的錢] 받는 일을 다시 했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중국음식점들이다. 1993년 친구가 하던 취영루 상계점을 인수해 새 사업을 시작했다. 10년 동안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인수할 때 하루 30만~40만원 팔던 곳인데 1995년 무렵 470만원어치를 팔기도 했다. 그는 “거침없이 잘되니까 간이 커졌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이웃 음식점 주인이 동업을 제안했다. 상계동 음식점은 후배 주방장과 아내에게 맡기고 1998년 분당에 ‘만다린’을 열었다. 식당 자리로 계약한 곳은 반지하 200평이었는데 인테리어도 안 하고 텅 빈 상태였다. 처음 갔을 때 빈 벽 전체가 돈으로 보였다. 운이 닿았는지 ‘만다린’은 성공 가도를 달렸다. 서울역 대우빌딩, 강남 신세계, 분당 삼성프라자, 영등포, 송파, 고양 일산 등에 지분제 직영으로 13개의 점포를 냈다. 처음 1년은 잘됐는데 너무 규모가 커지다 보니 누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사가 안 되는 건 아닌데 마진이 안 나왔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내가 남을 너무 빨리 믿고 마음을 너무 빨리 열어요. 이 문제로 늘 아내에게 꾸중을 듣지요. 사람이 주머니가 따뜻해야 하는데 동업자는 겉치레가 더 따뜻했어요. 남 탓할 것 없지요. 다 내가 관리를 잘못한 탓이죠. 큰 배움을 얻었어요. 주방장에게 맡겨둔 상계동 점포도 손님이 점점 줄었어요. 주방장이 게으르고 술을 좋아했어요. 그러면 장사하기 어려워요. 아내가 힘들어해서 정리했지요.”
2006년 세금 8억원을 추징당하며 ‘만다린’을 접고 분당에 ‘상해루’를 차렸다. 그리고 2009년 화성시 동탄으로 옮겼다. 둘째 아들을 가르쳐 물려줄 생각이었다. 아들은 “이렇게 힘든 걸 저더러 하란 말이냐”며 달아났다. “이런 사업 하려면 사람이 부지런해야 해요. 헝그리정신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요리는 노동인데 헝그리정신 없이 노동이 되겠어요? 아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새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데 동탄 ‘상해루’ 3년 만에 몸에 탈이 났다. 신장이 안 좋아져 투석을 받는 극한상황까지 갔다. 이식밖에 길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아버지의 뜻과 어긋나게 보령시에서 돈가스 집을 운영하는 둘째 아들이 막다른 길목에서 아버지를 살렸다. 신장 하나를 떼어준 것이다. 2013년 이식수술을 했다. 건강은 빠르게 회복됐다.“나에게 남은 시간은 4~5년이라고 봐요. 이제 후계자를 키워야 해요. 제자와 평생을 함께 가야 할 텐데 그러자면 내 것을 일정 부분 내줘야 해요. 후배 중에 성공해 부자 된 요리사 많지만 현재 22년을 함께 해온 한국인을 후계자로 내심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약간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완성이 눈앞이에요.”
아들에게 선물 받은 새로운 삶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그는 한국나이 예순여섯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직접 불 앞에 선다. 축구로 치면 감독 겸 선수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요리는 나의 삶이에요. 삶을 함부로 대할 수 없잖아요. 웍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 돌리겠습니다. 중화요리 잘한다는 사람들 많은데 내가 볼 때는 멀었어요. 원재료의 맛을 살려야 하는데 소스로 맛을 내려고 해요. 요리를 배우려면 헝그리정신이 반드시 필요해요. 죽기 살기로 덤비지 않을 거면 시작을 말아야 해요. 죽자 사자 하면 성공의 길이 다 열립니다.”
기본 식사 외에 2만원대에서 8만원까지 많은 단품 요리와 다양한 코스메뉴가 있다. 단골에겐 가격을 정해주면 곡 사부가 알아서 음식을 해주기도 한다. 좌석 100석. 주말엔 예약을 받지 않는다. 문 여는 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 매주 월요일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