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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7)] 최광, 숙청돼 탄광으로 19년 뒤 김일성 앞에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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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으로 조선인민군을 호령했던 오진우의 사망 이후 그 자리를 이어 받은 사람은 최광(1918~1997)이다. 김정일은 오진우가 사망한 이후 8개월 동안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었다. 그 자리를 비워둔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광은 인민무력부장이 되기 이전에 총참모장(1988~1995)으로 오진우와 함께 조선인민군을 이끌었다.

북한 영화 `백옥`에서 최광 총참모장이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에게 군사동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북한 영화 `백옥`에서 최광 총참모장이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에게 군사동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최광이 바로 인민무력부장이 되지 못한 것은 과거의 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최광은 한 때 김정일에게 미움을 받아 숙청된 적이 있었다. 최광은 1969년 1월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 김창봉 등과 함께 숙청돼 광산노동자로 전락했다. 공식적인 숙청 이유는 당 정책의 불이행, 군벌관료주의화였다. 당시 그의 직책은 총참모장(1963~1968)이었다. 북한군의 총참모장은 우리의 합참의장과 같은 군 실권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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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사려졌던 최광이 부활한 것은 1977년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을 맡으면서다. 8년만에 복권한 것이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사망(심장마비)할 때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다. 조선인민군 원수, 정치국 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정·군에서 주요 요직을 거쳤다. 군인으로서의 명예회복은 1988년 그가 군복을 벗을 당시 직책이었던 총참모장에 복귀하면서 이뤄졌다.

19년 만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최광은 총참모장에 임명된 뒤 김일성을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한다. 북한에는 숙청됐다가 복권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최광과 같은 혐의로 같은 시기에 숙청됐던 김철만(1920~ 생존) 전 제2경제위원장 겸 국방위원도 시기는 모르지만 복권해 왕성한 활동을 했다.

최광(사진 가운데) 인민무력부장이 1995년 10월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김정일(사진 오른쪽), 이을설(사진 왼쪽) 등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최광(사진 가운데) 인민무력부장이 1995년 10월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김정일(사진 오른쪽), 이을설(사진 왼쪽) 등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최광이 총참모장·인민무력부장으로 있던 시기는 제1차 북핵위기와 고난의 행군(1995~1997) 등으로 북한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때였다. 최광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사망한 이후부터 김정일에 이은 북한 군부의 2인자였다. 따라서 내우외환에 앞장서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시기에 김정일 시대의 통치이념인 선군정치가 탄생했다.

최광의 별명은 ‘독종’이다. 항일빨치산 시절과 6.25전쟁때의 활약과 인생의 고비마다 오뚜기처럼 불굴의 의지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오뚜기 인생의 대명사인 덩샤오핑(1904~1997)이 사망한 지 이틀 뒤에 최광이 사망했다.

최광(사진 오른쪽)이 총참모장 시절인 1994년 6월 중국을 방문해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최광(사진 오른쪽)이 총참모장 시절인 1994년 6월 중국을 방문해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그의 사망은 ‘막강 권력’ 인민무력부장 시대의 마감을 예고했다. 인민무력부장은 제3대 김창봉부터 군부의 대명사가 됐다. 최현을 거쳐 오진우가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 자리로 올랐다. 김일성 사망과 고난의 행군을 거친 뒤 김정일 시대가 되면서 군의 위상이 변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조국보위도 사회주의 경제건설도 인민군대가 맡자”고 강조했다.

그 첫 사업으로 군대가 금릉2동굴과 청류다리 공사를 맡으면서 군인들이 국가건설에 투입됐다. 그러면서 조선인민군의 핵심 보직인 인민무력부장, 총정치국장, 총참모장의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군의 정치사업을 총괄하던 총정치국장이 군부대 서열 1위가 됐고, 총참모장이 작전국· 정찰국 등 현역군단들을 지휘하면서 서열 2위, 인민무력부장은 후방총국·대외사업국 등 외교·지원사업을 맡으면서 서열 3위로 밀려났다. 인민무력부장은 휘하에 전투 병력이 없는 장군이 돼 버렸다.

이런 군부의 역할 변화는 김정일이 군을 두려워한 점도 있다. 과거 김창봉 사례를 경험한 김정일이 군부가 언제든지 정권의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총정치국장이 군부 동향을 확실히 장악함으로써 군부 쿠데타 등 정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지금도 이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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