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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난 몰라’ 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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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을 강타했다. 살처분된 닭이 벌써 2500만 마리에 이른다. 계란대란 때문에 달걀 없는 해장국을 팔아야 할 형편이고, 치킨집과 치맥집이 속속 문을 닫는다. 국가 기능을 마비시킨 최순실 게이트가 양계장, 식당, 치킨 체인점, 서민 밥상에도 한파를 몰고 왔다. 시베리아와 아무르강 타이가숲에서 이륙한 철새 떼는 겨울 내내 한반도 전역에 무작정 착륙할 예정이다. 이번 겨울은 통치권이 소멸된 공간에 날아드는 AI와 싸워야 할 모양이다. 한 달 전, AI가 최초 보고된 전남 해남에 촘촘한 방역망을 둘러치고 생매장이라는 강수를 썼더라면 어지간히 방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신바람 난 철새들은 바이러스를 빠르게 살포했고 애꿎은 닭만 죽어 나갔다.

대통령은 관저에 틀어박혔고
청와대 실세들은 ‘난 몰라’였다
그 극단적 무능과 소인적 행태
그들은 왜 청와대에 있었는가
그들에게 국민은 무엇인가?

 텅 빈 논밭에 내려앉은 철새를 낚아채 주리를 튼다 해도 꽥꽥 소리만 지를 뿐 AI 주범임을 부인할 거다. 그 수많은 무리 중 누가 주범이고 누가 공범일까. 닭과 오리가 수천만 마리 더 매장되고, 계란이 씨가 말라도 AI를 살포한 개체를 찾기는 틀렸다. 방역망을 한없이 넓힐 뿐이다. 이게 꼭 청문회를 닮았다. 대통령이 친애하는 최순실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곪아 터진 상처 자국이 선명한데 ‘최순실’을 만난 사람은커녕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고 항변하는 꼴이 그렇다. 청와대에 앉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는 최고 엘리트들이 그러하니 씁쓸하다 못해 부끄럽다. 국정 농단의 상처는 유혈 낭자한데 자신과는 ‘관련 무(無)!’거나 ‘난 모른다’로 일관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발각됐으니 다행이지 호열자보다 더 무서운 최순실인플루엔자(CI)가 ‘난 몰라’ 공화국을 쓰러뜨렸을 거다.

 주범·공범을 색출하려는 청문회 의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듣기에도 거북한 내용들이 쏟아졌다. 태반·백옥·감초주사 등등. 비아그라와 발모제 용도도 캐물었다. 참다 못해 유력 일간지 어느 논설주간은 ‘속치마까지 들춘다’고 장탄식을 했다. 사생활은 분명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치료행위는 국가 기능의 핵심 사안이다. ‘건강’은 사적인 것이나 ‘건강 문제’는 공적인 것이다. 청와대에 입성하는 순간 프라이버시를 국민에게 반납해야 한다. 국민 주권을 위임받는 요건은 그리 무섭고 냉정하다. 그 기본을 깼으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속사정까지 파헤치게 됐다.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정치가 정상 궤도를 이탈한 기원과 통치 양식의 내부를 밝히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런데 청와대 의무실장도 주치의도 주사제 처치를 본 적이 없단다. 그럼 마취제나 프로포폴은? ‘난 몰라’다. 뭔가 대통령 몸에 주입됐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면내시경 마취 전 국무총리에게 비상대권을 위임한 일화가 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의 답변은 더욱 가관이다. 세월호 7시간, 대통령 소재를 몰랐다고 했다. 통화는 했으나 소재를 묻지 않았고, 행동요령을 조언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왜? 월권행위라서. 300여 명의 생명보다 권한 경계가 중요했던 거다. 언론 검열, 세무 사찰, 어용단체 동원을 자행했던 기춘대원군은 유독 ‘그날’만큼은 나약했음을 연출했다. ‘권한 밖의 일입니다’. 국가안보실장도 꼭 같았다. ‘해군·특공대 투입은 권한 밖의 일입니다’. 최고 율사, 꼿꼿 장수는 참사 현장 중계를 보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대통령은 관저에 틀어박혔고, 청와대 실세들은 국민 재난에 ‘난 몰라’였다. ‘난 몰라’ 공화국의 극단적 무능과 소인적 행태는 그렇게 드러났다.

 청와대 실세들은 앵무새 군단이었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옅은 냉소를 날리면서 ‘난 몰라’를 중얼댔다. 사정기관에서 수집한 고급 정보를 총괄하는 민정수석이 최순실을 몰랐고, 문화체육관광부 전횡을 몰랐고, 기업 돈 갹출을 몰랐다면 왜 그 자리에 있는가? 직무유기이거나 무능력자임을 자인하는 거다. 아니면 법률지식을 동원해 무능이 유능보다 형량이 적다는 걸 노린 비열한 연출이다. ‘난 몰라’ 공화국의 몰염치는 이화여대 부정입학을 캐는 자리에서도 재연됐다. ‘진정 난 몰랐네’를 항변하는 총장의 눈물은 처절했다.

 ‘난 몰라’ 병에 안 걸린 딱 한 사람은 조원동 전 경제수석이었다. 그는 시인했다. ‘청와대에서 윗분의 지시를 어기기 어렵습니다’.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돼 공격에 열을 올리는 의원들 중 그 소리에 신경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난 몰라’ 병은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무사고(無思考)에서 발원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애국심! 자신의 통치행위는 어떤 형태라도 정당하다는 그 믿음 말이다. 아버지 박정희에게서 터득한 군주적 성정을 김기춘은 ‘차밍하고 엘레강스하다’고 했고, 우병우는 ‘진정성을 믿기에 존경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난 몰라’ 공화국 실세들의 애창곡은 이 노래다. 심수봉이 불렀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그 눈빛이 너무 좋아/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사랑밖엔 난 몰라’. 그들에게 국민은 무엇인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 ·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