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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 주름잡고 중국·고려 넘나든 ‘신드바드의 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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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15면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구도심엔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쌓은 요새가 우뚝 서 있다. 오늘날 이 요새는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무스카트의 랜드마크다. [사진 주강현]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남쪽으로 180여㎞ 떨어진 항구도시 칼하트(Qalhat)는 오만의 오랜 도시 중 하나다. 13세기에 마르코 폴로, 14세기에는 이븐 바투타가 이 도시를 거쳐갔다. 당시 칼하트는 인도에서 끊임없이 상인들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다. 아라비아 최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이렇게 묘사했다.


“칼하트 시가는 훌륭하다. 대단히 아름다운 사원이 있는데, 벽은 타일을 붙였다. 쌀은 인도에서 수입된다. 주민은 상인들로서 생활수단은 인도양을 통해 들여오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배만 들어오면 그들은 아주 반가워한다. 주민은 아랍인이지만 쓰는 말은 표준어가 아니다.”


이 짧은 묘사는 많은 내용을 함축한다. 칼하트는 항해가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인도 무역으로 번성한 국제 개방도시였다. 오늘날 오만의 항구도시들은 깨끗하고 선명한 느낌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에서 인도양을 바라보며 줄지어 선 항구도시는 대추야자와 흰색 아라비아풍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바자르(시장)에는 인도식 공예품과 바다를 건너온 향신료가 낯선 이방인을 환영한다.


아랍식 돔 지붕과 아라베스크 문양의 창, 페르시아·포르투갈·인도·서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건축양식은 독특하다. 메마른 산악과 건조한 사막, 열풍이 부는 사막과 바닷바람이 부는 해안이 극적인 조화를 이룬다. 흰색과 베이지색으로 통일된 건축물이 현대적 서구풍 건물과 병존한다. 전통의 미와 현대의 느낌을 묘하게 조합한 항구도시가 즐비하다.


무스카트 공항에 도착하니 왠지 자존심 가득 찬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만항공 스튜어디스나 남자직원 옷차림부터 다른 나라와는 달랐다. 머리에 두른 두건은 이 원대한 ‘항해의 나라’에서 다우선을 타고 인도양을 넘나들던 신드바드의 차림새다. 오만왕국(Sultanate of Oman)은 ‘신드바드의 나라’다. 신드바드는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남아·중국으로 오가던 뱃사람이다. 오만은 페르시아만 길목에 위치한다. 페르시아 무역선은 오만 영해를 통과해 인도양으로 들어갔다. 지정학적 위치는 오만을 해양강국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는 대식국(大食國)이라 불렀던 아라비아의 국제무역상은 인도양을 휘젓고 인도와 중국, 심지어 고려까지 넘나들었다.


기원전 10세기께 지중해와 홍해, 아라비아의 해상교역이 이미 존재했다. 페르시아만을 통해서는 이미 8세기께 바빌론~인도 해상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2세기께 프톨레마이오스는 무스카트를 ‘잘 숨겨진 항구’로 묘사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와디(사막의 간헐천)계곡이 이어진다. 앞으로 펼쳐진 바다로 나가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입지다. 이는 중국의 푸저우(福州)가 산에 둘러싸여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어 화교의 본산이 된 것과 비슷하다. 육지 쪽에서는 좀처럼 접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예멘 쪽에서 건너온 초창기 정착민은 전적으로 바다에 의존하는 삶을 선택했다.


오만에 인도 배만 몰려든 것이 아니다. 바그다드 태생의 아랍 여행가이자 역사가인 마수디(Masudi·896~956)는 중국 배가 항상 오만·바레인·바스라 등으로 향했다고 했다. 『신당서』 43권에 등장하는 몰손국(沒巽國)은 오만 북부의 소하르 항구다.


지중해~중국 중개무역으로 부 축적8세기 이후 아랍인은 유대인·인도인을 대신해 인도양의 패권을 독점했다. 아랍인은 1498년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남부서 말라바르 해안에 출현하기 이전까지 인도양을 누볐다. 아라비아 상인은 지중해와 인도양, 중국을 연결시키는 중개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 광저우에는 아랍인 공동체가 형성됐으며 무슬림 사원이 들어섰다. 탐사대가 지난 연말 방문한 광저우 회성사(懷聖寺)는 바로 오만에서 출발한 상인들이 당나라 초기 조성한 중국 최초의 회교사원이었다. 아랍 상인 술레이만은 대식상인이 페르시아만에서 광저우까지 활약한 정황을 여행기(851년)에 적어 두었다. 이라크의 바스라, 혹은 오만의 시라프와 무스카트항을 경유해 아라비아해를 통해 인도 남서부 콜람에 닿은 후 스리랑카·벵골만·안다만섬·니코바르섬·수마트라·베트남 참파 등을 지나 남중국에 도착했다. 그들 아라비아 상인이 고려의 벽란도에 와서 인삼이나 청자 등을 사갔다. 『고려사』에는 현종 15년(1024)에 대식국에서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정종 6년(1040)에는 대식국 상인이 수은·점성향·몰약·소목 등을 바쳤다고 했다. 아라비아와 고려 사이에 대규모 무역이 있었다는 증거다.


무스카트의 해양전략적 중요성을 서구 세력이 간과할 리 없었다. 1507년 포르투갈은 항구를 접수해 성채를 쌓는다. 제국 확장에 앞장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이 천혜의 항구를 매혹적이고 우아한 도시로 묘사했다. 그런데 근년에 오만에서 아주 흥미로운 수중 발굴이 진행됐다. 바스코 다가마가 1502년부터 1503년에 걸쳐 두 번의 인도 항해를 하던 중 침몰했던 에스메랄다호가 오만 해역에서 발굴된 것이다. 수천 점의 유물 중에는 포르투갈이 인도와의 교역을 위해 주조한 특수 동전 인디오(Indio)도 인양됐다. 희망봉을 돈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동부 연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오만을 거쳐 인도로 넘어간 흔적이다.


오만 사람들은 포르투갈 지배를 오랫동안 방관하지 않았다. 오만의 용맹무쌍한 뱃사람들은 1650년 포르투갈을 쫓아낸다. 오늘날에도 포르투갈 요새는 도시의 랜드마크가 돼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중이다. 16세기 포르투갈이 세운 요새 두 채는 여전히 도시를 굽어보고 있으며, 옛 성벽과 성문도 남아 있다.


오만 술탄, 탄자니아 잔지바르 지배도 오만은 포르투갈을 쫓아낼 정도로 강력했다. 단순히 현재의 영토만으로 그들의 해양 지배력을 한정 지으려 하면 안 된다. 오만은 해외 영토도 거느렸다. 오만 술탄은 탄자니아 잔지바르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오만 통치자 사이드 이븐 술탄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통하는 노예·상아무역의 중심지 잔지바르를 1832년 수도로 삼았다. 당시 인도양을 무대로 엄청난 숫자의 다우선이 오고 갔다. 인도양의 주역은 오만 뱃사람들이었다. 1861년 잔지바르는 오만으로부터 분리독립된 술탄국이 됐다. 현재 잔지바르에는 아랍과 무슬림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동아프리카 바다를 ‘오만의 바다’라 지칭할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스카트의 오랜 상업 거점 마트라흐(Mutrah)를 찾았다. 오만의 공예품·골동품·향료·옷감·금 등을 파는 마트라흐 바자르는 이 오래된 무역항의 자존심을 증명한다. 좁은 골목으로 히잡을 쓴 여인들이 천천히 걸어다니고,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전통도시의 품격을 제대로 갖춘 마트라흐 중앙에는 포르투갈 요새가 높게 서 있다.


항구 동쪽의 수산시장은 여느 시장처럼 아침 해가 뜰 무렵 시작해 오후 10시까지 흥청거린다. 아랍 세계의 삶이 그러하듯 그 흥청거림이란 것도 침묵 속의 조용한 번잡함 정도다. 어시장을 중심으로 해산물 먹거리 좌판이 벌어질 만도 한데 음식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횟감을 기대한 나그네는 눈요기만 실컷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산물 중 으뜸은 역시 인도양 참치였다. “참치들이좀 작아 보이네요”라고 상인에게 말을 건넸다.


“큰 놈이 1m 조금 넘고, 대체로 80~90㎝의 작은 놈들을 팝니다. 거래하는 것들은 모두 생물이지요.” 상인은 참치가 냉동이 아닌 생물임을 강조했다. 참치는 무스카트 어시장에서 중요 거래 품목이다. 무슬림 사회에서 수산업은 식량 공급에서 중요한 몫을 하며, 수출과 고용에도 기여한다. 특히 오만의 시골 어촌은 수산업 비중이 크다.


오만은 ‘2012 여수 세계박람회’에도 참여했다. 오만 전시관은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강한 관심을 표명했던 기억이 있다. 오만의 풍부하고 다양한 어획자원은 석유와 천연가스 다음가는 국부의 원천이다. 어종만 무려 1142종에 이른다.


오만에서 잊지 말아야 할 고풍스러운 항구도시가 하나 더 있다. 신드바드의 고향인 소하르(Sohar)다. 1000년 전 소하르는 큰 항구였다. 무스카트가 뜨기 전엔 오만 자체를 가리켰다. 옛 이름은 마잔(Majan)으로 이미 3세기께에 구리 제련으로 유명했다. 제련된 구리를 메소포타미아와 오늘날 바레인으로 수출해 부를 축적한 도시였다. 이 정도의 오랜 해양 역사를 갖고 있었으니 인도로, 중국으로, 심지어 고려 벽란도까지 배를 보냈던 것 아닐까.

역외 영토인 무산담 반도의 공항은 사방이 황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진 주강현]

무산담 반도의 한 바위에 새겨진 낙타 암각화.

소하르는 3세기 구리 제련으로 유명탐사의 마지막은 무산담(Musandam) 반도라는 ‘역외 영토’에서 마무리됐다. 페르시아만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에 돌출한 무산담 반도는 무스카트 공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여 거리다.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다. 하루에 한 번 닿는 작은 비행기에 원주민 몇 명이 내릴 뿐이다. 사방이 사막과 산으로 둘러싸인 무산담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황량한 바람이 부는 사막에 작은 마을이 있고 양떼들이 메마른 들판을 지나간다. 산과 산을 돌아 가파른 도로가 만들어져 있고 낭애 아래로 푸른 호르무즈 해협이 펼쳐진다.


이븐 바투타는 14세기에 호르무즈를 지나가면서 아랍어·페르시아어·영어·힌두어·포르투갈어가 들리는 곳이라 했다. 당시에도 신호르무즈, 즉 섬에 형성된 이란 측의 호르무즈가 있었다. 아름답고 큰 도시로서 시가도 꽤 흥청거렸다. 인도에서 오는 선박의 정박지로 이곳에서 이라크나 페르시아로 운반된다고 했다.


이제는 대추야자 대신에 원유를 실은 탱크선이 지나간다. 이 ‘기름의 바닷길’ 연장선의 끝자락쯤에 우리의 부산과 광양 등이 연결돼 있을 것이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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