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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는 티냐넬로 대신 샤또를 마시라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3호 26면

이탈리아 와인 티냐넬로(왼쪽)와 프랑스 와인 소테른.

TV 드라마에서 와인의 등장은 이제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와인업계 종사자를 주제로 한 드라마도 나왔다. 아쉬웠던 것은 갈수록 와인의 본질보다 남녀 간 사랑 이야기로 빠지는 바람에 좀 허탈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드라마 작가들이 와인에 관심을 갖게 돼 극에 등장시키는 것 같은데, 때론 어설프고 정확하지 않은 설정을 그대로 내보내는 해프닝도 종종 보인다.


필자가 기억하는 첫 번째 해프닝은 극중 소테른 와인의 등장이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발랄한 두 여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주문하면서 “우리 기분 전환으로 화이트 와인 한 병 마실까”하면서 시킨 것이 소테른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화이트 와인이 아니고 와인 전문가들이나 잘 아는 프랑스 보르도의 소테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귀부 와인(귀하게 썩은 와인)’이 언급됐다는 점에 몹시 놀랐다. 소테른 와인은 포도 표면에 수분을 빨아먹는 버섯이 생겨 마치 썩은 것처럼 보이는데, 덕분에 맛이 응축돼 풍미가 깊고 단맛이 강하며 수확량도 적어 비싸고 귀하다. 주로 디저트나 푸른 곰팡이 치즈와 함께하는 스위트 와인이다.


때문에 일반 요리를 먹으며 이 와인을 주문한다는 것은 맞는 선택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달콤한 식혜를 메인 음식과 함께하는 것과 같다. 당시 필자는 아마 극작가가 소테른 와인 맛을 한번 경험하고 큰 감명을 받아 이같이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세월과 함께 그 작가의 와인 실력도 늘었을 테니 본인이 그 장면을 다시 보면 적당한 풍미가 있는 다른 와인으로 고치고 싶어하지 않을까. 와인을 좋아하는 단계가 보통 스위트한 화이트에서 드라이한 화이트를 거처 레드 와인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두 번째 황당한 대사는 올해 TV극에서 보았다. 결혼한 여 형사와 재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드라마였다. 사이코패스의 어머니가 호텔 바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는 장면에서 와인 병을 보고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 맛없는 티냐넬로를 왜 마시고 있어요? 샤또를 마시지.”


필자는 이 대사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우선 티냐넬로는 이탈리아의 유명 와인가문 안티노리가 생산하는 고급 레드 와인이다. 키안티 지방의 주 품종인 산지오베제 80%와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20%를 섞어 만들었다. 한때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임원들에게 선물했다는 기사 때문에 ‘이건희 와인’으로도 불렸던 유명 와인이다.


물론 이보다 좋은 와인을 매일 마시는 사람들에게 이 와인은 맛 없는 와인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대사, “샤또를 마시지”는 더 충격이었다. 일반적으로 샤또는 와인의 이름이 아니다. 번역하면 성(城)이고 와인과 관련되면 ‘양조장’으로 보면 된다. 작가가 샤또란 이름이 고급 와인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잠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프랑스의 고급 샤또 이름(무통·라투르·라피트·오브리옹·마고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면 오히려 나았겠다. 아니면 같은 포도밭에서 생산되지만 티냐넬로보다 윗급인 ‘솔라이아’를 권했다면 와인애호가들이 더 좋아했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세계에서 마시는 와인이 최고급 샤또의 와인이라 이를 통틀어 샤또 와인이라 말했는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이나 장면이 전후에 없었기에 와인을 좀 아는 시청자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이 대사를 듣고 나서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가들과 와인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드라마 한류 열풍이 여전히 뜨거운데 이런 잘못된 대사 한 마디 때문에 품격이 떨어져서야 되겠는가.


김혁


와인·문화·여행 컨설팅 전문가www.kimhyu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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