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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높이 날고 싶었을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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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7면

첼리스트 지진경은 국내에서 활약하는 많지 않은 유력 첼리스트 가운데 1인이었다. 13세에 유학을 떠나 오랜 기간에 걸쳐 전문연주자 과정을 마쳤고 다수의 해외연주로 기대주로 평가받기도 했다. 2000년 전후로 출시된 음반 2매-‘Rhapsody’(1998), ‘Memory’(2002)-를 통해 들은 그의 연주는 인기곡을 앞세우지도 않고 힘으로 과시하는 흔한 신진연주 경향과도 다르다. 그가 즐겨 연주하던 루이 쿠프랭의 음악이 그렇듯 우아하고 차분하며 매우 격조 높은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기술을 내세우지 않지만 흠잡을 데도 없었다.


좋은 연주가가 탄생했구나. 듣고 난 뒤의 결론이다. 결국 그의 음악활동 전체의 결산이 되어버린 이 음반들을 리뷰한 인연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여기서 돌연 멈췄다. 2015년이 저물어갈 무렵 신문 한 귀퉁이에서 믿어지지 않는 기사를 접했다. 그는 야산 등산로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음반 ‘Rhapsody’는 유명 주자들이 즐겨 출반하는 전형적 소품 모음집이다. 일종의 귀국 인사라고 할까. 17세기 프레스코발디에서 20세기 포퍼까지 모든 곡이 서정성 짙은 곡으로 짜여있는데, 부드럽고 유연한 톤을 가진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그러나 지진경의 진면목은 두 번째 음반 ‘Memory’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실황녹음 덕분인지 한층 활력도 느껴지고 조금 아쉽게 느끼던 박력도 넉넉히 감지할 수 있었다. 첫 곡인 쿠프랭의 ‘Pieces en Concert’는 푸르니에, 슈타커 등 대가들도 즐겨 연주하는 화사하고 멋진 곡이다. 명인들의 연주로 귀가 익숙해 있으나 지진경의 조심스런 톤과 날렵한 솜씨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두 번째 주목할 곡은 그가 대미로 선택한 라흐마니노프 첼로소나타 op.19다. 스케일이 크고 다이나믹한 테크닉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과 대조된다. 격동의 시대상이 반영된 곡이다. 이처럼 무겁고 장려한 음악을 민첩하고 대범하게 처리하는 데서 연주자의 넓은 시야,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되었다.


‘두 개 음반으로 이 연주가는 낭만파 음악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단단한 기량의 연주력을 십분 보여줬다. 인기곡에 매달리기보다 진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자세에도 호감이 간다.’ 오래전 리뷰의 끝 구절이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거기서 멈춰버린다.


한 사람의 첼리스트를 탄생시키기 위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공부 장소가 해외로 바뀌면 악기의 큰 몸체 때문에 물리적 고역이 더해진다. 때로는 차량과 전용기사, 통역까지 동원된다. 이 얘기는 손익차원 얘기가 아니다. 쏟은 땀과 시간과 희망의 부피를 말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모두 거쳤다고 해서 한 사람 연주가가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의 정령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그 문에 입장한다. 지진경은 그곳에 매끄럽게 입장했다. 그런데 왜? 그는 더 높은 곳을 탐했을까?


더욱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은 언제나 현기증이 찾아온다는 것을 계산하고 있어야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공포증인가? 그렇다면 난간에 안전장치를 해 놓은 높은 전망대에서도 우리에게 현기증이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현기증은 추락공포증과는 다른 것이다. 현기증은 심연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심연은 우리 마음속에 추락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럴 때 우리는 깜짝 놀라 이 동경에 대해 방어한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


평범한 인간도 가끔 이 유혹을 느끼긴 한다. 그런데 지진경은 음반 카달로그에 이런 기록을, 아주 드문 경우인데, 남겨놓고 있다. ‘아둔한 인간이 예술로 들어가는 어둡고 고통스런 터널. 자기 속의, 자기만의 깊은 영혼을 감동으로 옮기는 그 힘든 걸음걸이를 아직은 멈추고 싶지 않다. 다시 삶의 아름다움, 기분 좋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희망을 가졌다가는 밀려드는 갈등과 반추되는 어떤 슬픔으로 침몰한다.’


앞의 ‘심연의 유혹’과 이 연주자의 기록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쪽 모두 위기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문이지만 음악은 그에게 전혀 치유의 혜택을 베풀지 못했을까? 나는 전에도 시인과 작가인 두 친구에게 음악의 치유를 권한 적이 있으나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첼리스트는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며 음악 자체가 삶이었다. 그런 사랑이 없다면 쿠프랭과 라흐마니노프 첼로소나타 3악장 연주처럼 활달하고 치열한 연주는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질을 두루 갖춘 첼로연주자가 드문 상황에서 그를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천국에서 음악의 더 높은 지점을 향해 마음껏 비상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글 송영 작가 mdwr31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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