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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천하 천씨의 정당’ 소리 들었던 천리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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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28면

1931년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부장 시절, 상하이의 문화 예술인 집회에서 연설하는 천리푸. [사진 제공 김명호]

20여 년 전 만해도 천리푸(陳立夫·진립부)에 관한 얘기를 하는 분들이 종종 있었다. 한반도가 불구덩이였던 1950년 8월 24일 타이베이의 총통관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천리푸를 불렀다. 모질게 한마디 하고 자리를 떴다. “24시간 안으로 대만을 떠나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가라. 내가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 천리푸를 위로했다. “미국에 가면 교회를 열심히 나가라.” 천리푸의 대답은 엉뚱했다. “영수(領袖)에게 버림받은 몸이 상제(上帝)는 믿어서 뭘 하겠습니까.”


2001년 2월 8일 대만 중부도시 타이중(臺中), 며칠 전까지 멀쩡하던 102살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뉴욕에 있던 쑹메이링은 천리푸의 사망소식을 흘려 듣지 않았다. 측근이 구술을 남겼다. “평소처럼 신문에 실린 중국관련 기사를 읽어 드렸다. 그날따라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온 종일 흔들의자에 앉아 창 밖만 내다봤다. 손수건이 자주 눈 쪽으로 갔다.”


감회가 새롭기는, 하와이에서 만년을 보내던 장쉐량(張學良·장학량)도 마찬가지였다. 천리푸의 사진이 실린 뉴욕타임스를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건네며 웅얼거렸다. “정말 지독하고 복잡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1년 먼저 태어났다. 염라대왕에게 나를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8개월 후, 장쉐량도 인간 세상을 뒤로했다.


대륙의 지인들은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였다. 국민당 통치시절, 천리푸와의 은원(恩怨)을 회상하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생전에 했던 말을 되새겼다. “우리의 적 중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중공도 무심치 않았다. 국영통신사 신화사(新華社)가 사망소식을 전국에 타전하며 애도를 표했다. 언론 매체는 말할 곳도 없었다. “장(蔣)·콩(孔)·쑹(宋)·천(陳) 중국 4대 가족의 마지막 생존자 천리푸 선생이 사망했다”로 시작되는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한결같이 중국문화 선양과 중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한 후반생을 찬양했다.


대만은 대륙과 딴판이었다. “총통부 국책고문 천리푸가 사망했다”며 1947년 5월 26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인물이었다는 소개가 고작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민당은 예전의 국민당이 아니었다. 대륙시절, 약관의 나이에 형 천커푸(陳果夫·천과부)와 함께 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해 “장제스의 천하에 천씨의 정당(蔣家天下陳家黨)”소리를 들으며 군림했던 천리푸의 사망소식에 별 흥미가 없었다.


천리푸는 어릴 때부터 지하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했다. 어딜 가건, 손윗사람들에게 땅을 가리키며 같은 질문만 해댔다. “이 밑에 뭐가 있나요?”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 땅속에 뭐가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청년이 돼서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텐진(天津) 베이양(北洋)대학에서 채광학(採鑛學)을 전공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 채광학과에 유명교수들이 많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들떴다. 형 커푸가 있는 광저우(廣州)로 갔다. 천커푸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사용할 무기 조달에 여념이 없었다. 천리푸의 계획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돈이 없다. 삼촌에게 가자.” 형제가 말하는 삼촌은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였다.


형제를 만난 장제스는 천리푸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평소에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많이 컸구나. 너를 보니 잉스(英士·영사)를 보는 듯하다.” 잉스는 딴 사람이 아니었다. 형제의 친삼촌 천치메이(陳其美·진기미)였다.

1차 국공합작시절, 국민당 원로 장징장(張靜江·의자에 앉은 사람)을 방문한 천커푸(왼쪽)와 천리푸(뒷줄 오른쪽 둘째). [사진 제공 김명호]

장제스는 죽는 날까지 쑨원(孫文·손문), 쩡궈판(曾國藩·증국번), 천치메이 세 사람을 존경했다. 중국인들 사이에 노래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신해혁명을 말할 때 쑨원을 빠뜨릴 수 없다. 쑨원을 말할 때 천치메이를 빠뜨릴 수 없다. 중화민국 건립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빠뜨릴 수 없다. 위안스카이를 논하려면 천치메이를 빠뜨릴 수 없다. 장제스를 빠뜨린 국민당 역사는 휴지조각이다. 장제스를 설명하려면 천치메이부터 시작해야 한다.” 장제스를 혁명의 길로 이끈 사람이 천치메이였다.


천치메이는 쑨원의 오른팔 왼팔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총통 위안스카이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자객을 보내 죽여버렸다. 위안스카이의 위세가 하늘을 덮고도 남을 시절이다 보니 다들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그 누구도 장례는커녕 천치메이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달려와 방치돼있던 천치메이의 시신을 염(殮)하고 성대한 장례를 치른 사람이 장제스였다. 그만큼 사이가 친밀했다.


장제스에게 천치메이의 친조카 커푸와 리푸는 친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천치메이는 후손이 없었다. 천리푸는 장제스가 보내준 돈으로 미국유학을 마쳤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귀국 후 산둥(山東)성에 있는 탄광에 취직했다. 체질에 맞았다. 탄광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6년 여름, 장제스의 부름을 받았다. 황푸군관학교 교장실 기요비서(機要秘書)를 시작으로 관계에 발을 디뎠다. 직책은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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