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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이야기 담겨 있어야 진짜 명품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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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24면

“많은 사람들이 ‘럭셔리는 클래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클래식은 자칫 진부하다는 느낌을 주죠. 또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을 럭셔리라고 할 수 있나요? 나만의 이야기가 있고 나만의 독창성이 담긴 것, 그게 진짜 럭셔리지요.”


이런 도발적인 발언의 주인공은 싱가포르와 런던을 무대로 활약하는 신세대 악어백 디자이너 에단 고(Ethan Koh) 다.


올해 나이 서른인데 이미 5년 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에단 K(ETHAN K)’를 론칭했다. 에단 K는 현재 런던 해롯 백화점을 비롯해 뉴욕의 삭스 피프스 애비뉴, 모스크바 중앙백화점, 파리의 편집숍 레클레어 등에 입점해 있다. 그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자신이 디자인한 검정색 악어가죽 재킷을 입고 서울을 방문한 그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1900년대 초기, 중국을 거쳐 싱가포르에 정착한 에단의 증조부가 영국의 무두질 장인에게 배운 것은 기술만이 아니었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고의 재료를 이용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장인 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4대에 걸쳐 에단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악어 가죽을 다루는 일은 어린 에단에게 자연스럽고 즐겁고 또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10살 때부터 아버지의 공장에서 마노석을 이용해 악어 가죽에 광택을 내는 집안의 비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10대 후반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니로 유학을 떠나 액세서리 제작 공정도 직접 보고 배웠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10년간 습득한 기술을 총동원해 엄마를 위한 백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알스트로메리아 꽃에서 받은 영감을 형상화했다.


스물두 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런던 컬리지 오브 패션과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가방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3년간 틈틈이 세계 최고의 명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를 명품 회사 인턴 생활을 통해 바닥부터 익혔다. “핸드백은 여성의 세컨 홈”이라는 신념으로 “나의 철학과 가치를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악어백 18개를 갖고 한 호텔에서 브랜드를 론칭한 게 2011년, 그해 여름에 놀라운 일이 런던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부르더라고요. 제가 든 백이 너무 맘에 든다고,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그래서 ‘이 백은 내가 나를 위해 디자인한 거라 하나밖에 없고 다른 곳에선 살 수 없다’고 말해줬어요. 그랬더니 다른 것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녀는 아랍 어느 나라의 공주였어요.”

어릴 적 읽은 동화 속 캐릭터를 준보석으로 형상화 그는 최고급 가죽을 쓴다. 바다악어(Porosus Crocodile) 중에서도 중앙 복부 가죽(Centre Cut)만 사용한다. 몸길이가 7~10m에 달하는 바다악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파충류에 속하는데 성격이 난폭하기로도 악명이 높다. 좋은 가죽을 얻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그는 “나의 ‘예술’은 제대로 된 가죽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가죽은 세 번 검사한다. 아침 햇살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그리고 밤에 전등을 켜고 다시 한 번. 그렇게 골라낸 가죽은 손자국이 거의 남지 않고 독특한 광택을 내는 슈퍼샤이닝 기법을 비롯해 크랙이 가지 않도록 하는 특수 다림질, 최대한 얇게 만들어 가방의 무게를 줄이는 과정 등을 거쳐 완성된다. LVMH 그룹은 2011년 1억2300만 달러(약 1420억원)를 주고 에단 가문의 싱가포르 가죽 공장의 지분을 51% 인수했다.


그는 다른 명품과 차별되는 포인트를 ‘스토리’에서 찾았다. 어릴 적 정원에서 엄마가 읽어주던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던 각종 동물들을 준보석을 이용한 액세세리로 형상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모험심 강한 고슴도치, 관능적인 뱀, 자유로운 나비, 행운의 개구리, 심지어 춤추는 라푼젤까지 다양하다. “아시아의 자연과 문화가 제 작품의 원천입니다. 화려한 색상의 꽃들, 선명한 색상의 과일들, 강렬한 느낌의 향신료를 과감한 색상과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죠. 이런 것들이 최상류 고객과 가방 전문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그에겐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영감의 원천이다. 런던에 처음 도착해 본 고색창연한 메이페어의 아르데코풍 아파트, 그로스브너 스퀘어에 있는 저택의 문 손잡이, 심지어 호텔 바의 천장에 매달린 사이키 조명에서도 뭔가를 낚아챈다. 남프랑스의 해안을 여행하면서도 그랬다. 주문제작을 맡긴 셀러브리티의 특징을 따서 라인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콘 컬렉션’이다.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하면서 그는 ‘기발한(whimsical)’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기존 명품의 문법과는 잘 맞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헐리와 헬렌 미렌, 모델 디타 본 티즈 같은 유명 인사들이 주목했다. 영국 왕실의 베아트리체 공주와 유제니 공주와도 친분이 돈독하다. 롤스로이스도 캠페인에 그의 제품을 사용했다.


오는 7월부터는 88개의 리미티드 에디션을 해롯 백화점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이 에디션에는 각각 흥미로운 제목이 붙어있다. 예를 들어 카타르 공주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든 ‘두 도시 이야기’는 초록·파랑·보라 삼색의 조화가 현란함의 극치를 이룬다. 자수정 걸쇠도 6개나 들어간다. 단 한 개만 제작한 이 백의 가격은 2만9000파운드(약 4860만원)다.


주문제작(BESPOKE) 시스템은 ‘에단 K’의 특징이다. 가죽·색상·스타일 등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준다. 제작 기간은 1년. 최고의 명품을 만들기 위해 1년에 1500개 이상은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첨단 EDM에서 영감 받아 새 제품 선보일 터 그는 올 들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주최한 ‘비즈니스 오브 럭셔리 서밋’에도 참가해 최근의 명품 경향 및 시장 추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사람들은 디지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것은 고객과 직접 만나서 그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관계가 먼저고 그 다음이 비즈니스입니다.”


서울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그는 통찰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서울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사람들이 흥미롭다고 했다. 특히 10일부터 12일까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축제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 코리아 2016’에 주목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EDM은 특히 젊은이들과 소통하기에 좋은 매개체이지요. 세계적인 DJ들과도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첨단 댄스 음악이 최고급 악어백에 과연 어떻게 구현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ETHAN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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