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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져도 깨지지는 않는 오랜 친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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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20면

살고 있는 동네에 대형마트가 두 곳이나 더 생겼다. 늘어난 숫자만큼 업체끼리의 경쟁은 불 보듯 뻔하다. 소비자가 속사정까지 헤아릴 이유는 없다. 기존 매장보다 더 큰 규모와 쾌적한 시설에서 다양한 상품 구색을 즐기면 그만이다. 이제 대형마트에선 작은 집과 보트마저도 판다.


가끔 작심하고 새로 생긴 마트를 찾는다. 관심 있는 상품을 꼼꼼하게 훑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성으로 지나치면 감추어진 내용들이 보이지 않는다. 진가를 알기 위해선 여러 물건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기왕 사들일 물건이라면 보물찾기 마냥 우연에 기댈 수 없다.


아무래도 남자들의 장난감이라 할 전자제품과 취미용품 칸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옆 자리엔 일상 작업도구 매대가 있다. 끝이 아니다. 이어 바로 아웃도어 용품이 나온다. 어지럽게 걸려있는 헝겊재질의 물병들에 시선을 빼앗겨 그냥 스칠 뻔했다. 낯익은 브랜드의 로고가 눈에 띄었다. 생각지도 못한 스탠리 제품은 진열장 아래쪽에 숨겨져 있었다.


투박한 만듦새로 믿음을 주다예나 지금이나 여름이면 식솔을 이끌고 캠핑 정도는 가줘야 가장의 면이 선다. 평소 써먹을 일 없는 수컷의 존재감은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동안만 빛나지 않던가. 아웃도어 용품 앞에서 기웃거리는 수많은 아버지들의 속마음은 비슷하다. 나도 한때 아들과 마누라 앞에서 폼 잡기 위해 열심히 아웃도어 용품을 사들였던 적이 있다.


처음 몇 번의 캠핑은 성공적이었다. 식솔들은 눈앞에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시원함에 빠졌고 밤의 한기를 신선해 했다. 계속 좋아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가는 데마다 몰리는 사람들로 짜증내기 시작했고 모기에 물려 긁적이는 괴로움을 참지 못했다. 호기심을 삭힌 캠핑의 기억은 즐겁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번거롭고 불편하고 옹색하기만 한 이 나라의 캠핑 현실이다.


평생 쓸 요량으로 최고의 아웃도어 용품만 고집했다. 쾌적한 숙소의 안락함을 좋아한 마누라는 다신 캠핑에 따라오지 않았다. 야속하고 억울했다. 다 누구 때문에 한 일인데…. 이후 작업을 빙자해 혼자 캠핑을 했다. 태백산 금대봉에서 홀로 지샌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비마저 부슬거리는 산 속에서 처량하고 청승맞게 앉아있는 사내를 만났다면 그게 바로 나다.


혼자만의 캠핑에서 큰 위안은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다. 스미는 추위를 녹여줄 따뜻함은 언제나 필요하다. 일일이 물을 데울 수 없다. 성능 좋고 튼튼한 보온병 하나쯤 준비해 두어야 안심이다. 스탠리의 존재를 알게 된 출발이다. 캠핑 좀 다닌다는 이들 쳐놓고 스탠리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한 번도 캠핑을 가보지 않은 이들도 스탠리를 안다. 언제 어디서든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고마운 물건인 덕분이다.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스탠리 제품을 구하기 위해선 꽤 발품을 팔아야 했다. 남대문 도깨비 시장이나 군용품 좌판을 일일이 뒤져야 했으니까. 나의 첫 스탠리 보온병은 1리터 용량의 중고품이다. 칠이 벗겨졌고 흠집마저 있었으며 때가 쪼록쪼록 묻은 코르크 마개여도 좋았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손에 넣은 물건인 까닭이다. 남대문의 군용품 좌판 아저씨는 단골이던 내게 선심 쓰듯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스탠리 클래식을 넘겨주었다.


날렵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만듦새가 외려 듬직하게 보였다. 커다란 금고 문짝이나 산업용 기계에서 보던 쫄쫄이 도장도 신뢰를 높였다. 형태의 묵직함에 더해진 진녹색은 몇 번 쓰고 처박아두는 물건이 아님을 일러준다. 무게도 만만치 않다. 얄팍한 유리 대신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로 만든 보온병이 묵직한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산 스탠리는 80년 이전에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생산 시기를 늦게 잡아도 15년 이상 써 온 물건인 셈이다. 어쩐지 귀신 붙은 물건 같았다. 아무렴 어떤가. 누군가의 손때가 묻고 사연이 담겼음직한 스탠리가 외려 친근하게 다가왔다. 당시의 물건은 지금의 것과 조금 다르다. 이중 철판의 진공 틈새에 탄소가루를 부어 넣어 보온, 보냉 성능을 높이기 위한 미국식 대처는 크고 무거운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50년대 미국의 풍요를 상징하던 미국 차의 무지막지한 덩치와 스탠리의 투박함이 수긍되는 바탕이다.


스탠리는 웬만큼 험하게 다뤄도 끄떡없다. 짐을 싸다 떨어드리기도 하고 바윗돌에 부딪치기도 했다. 찌그러지긴 해도 부서지진 않는다. 심지어 차 바퀴에 깔려도 멀쩡하다. 실수로 땅에 떨어뜨린 스탠리를 후진하다 깔아뭉갠 적이 있다. 폐차시켜 지금은 없는 현대 갤로퍼 SUV가 당시의 차다. 타이어에 전달되는 감촉이 이상했다. 통나무를 타고 넘는 듯한 느낌에서 아차! 싶었다. 차 밖으로 나와 확인해보니 내 보온병이 맞았다. 정확히 가운데로 지나간 바퀴 자국이 선명했다. 윗면이 약간 찌그러지긴 했다. 하지만 뚜껑은 제대로 열렸고 속에 든 커피는 여전히 뜨거웠다. 세상에 이런 보온병도 있다니!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 감탄은 나만의 몫이다.


이후 작업이든 청승이든 혼자 캠핑할 일은 없어졌다. 나 역시 쾌적한 호텔과 젊은 아가씨가 서빙해주는 커피가 좋아졌으니까. 변절이라 해도 할 수 없다. 다 나이 탓이다. 스탠리는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물건 또한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마누라가 고물 취급을 해 몰래 버렸을 것이다.

동네 마트에서 다시 만난 ‘친구’추억으로만 남은 스탠리를 동네 마트에서 다시 만난 감회는 남달랐다. 그동안 다양한 품목으로 가지 뻗기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 시대의 필요에 맞는 대응과 방식의 변화다. 도시락 통도 있고 간편하게 원두커피를 내릴 수 있는 커피 프레스 병도 눈에 띤다. 나는 그 중에서 클래식 모델이 역시 마음에 든다. 익숙한 형태와 견고함은 그대로다. 예전에 갖고 있던 1리터 용량의 클래식 모델은 계속 나온다. 무게가 가벼워졌고 플라스틱 마개로 바뀌었지만 특유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100년도 넘게 보온병을 만들어온 스탠리다. 미국인들과 함께한 애환과 일화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스탠리는 여전히 살아남아 미국인의 추억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간다. 증조부가 손자에게 물려주는 일도 흔하다. 보통 사람의 일상과 함께하는 스탠리는 따스함을 떠올리는 아이콘이 된지 오래다. 하찮게 보이는 물건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지켜본 친구 역할로 바뀌었다. 좋은 물건의 힘이다. 스탠리 본사는 사용자들의 애정 어린 이야기를 모아 공개했다. 광고가 아닌 진심의 감동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평생 트럭을 몰았던 이들에겐 동반자였다. 해군과 공군의 지급품으로 나라를 지켰고, 거친 자연과 맞섰던 모험가들에겐 생존을 위한 도구 역할을 맡았다. 부부싸움 하던 이들에겐 던져도 깨지지 않는 물건이 라 화풀이 감으로 제격이었다. 펑크가 난 타이어를 고일 때도 썼고 날아오는 총탄을 막아준 생명의 은인 역할도 했다. 이토록 많은 사연을 만든 스탠리는 여전한 현역으로 멀쩡하다. ‘미국인에게 가장 친근한 물건 5’ 순위 안에 끼게 된 이유다.


나의 두 번째 스탠리는 도시락 통으로 결정했다. 있어 보이는 말로 런치 박스다. 윗 뚜껑에 보온병을 넣고 빈 곳에 음식을 채워 넣으면 된다. 이젠 도시락 싸들고 갈 데도 없다. 대신 와인을 담아 멋진 풍광의 해변이나 시야가 터진 산에 펼쳐놓고 꼴짝거릴 심산이다. 문득 태백산에서 홀로 캠핑하던 시절이 그립긴 하다. 하지만 늦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지나간 시간을 애써 되돌리려는 안간힘은 볼썽사납다. 물 흐르듯 살아가는 일이 미덕일 것이다. 변함없는 물건의 아름다움을 곁에 둔 안도감만이 소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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