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태평시절의 개로 살고 싶다” 학살 겪은 민초의 悲願

중앙선데이

입력 2016.05.0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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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3면

진시황의 통일전쟁에서 맹활약한 진나라 대장 백기. 참혹한 포로 처형과 학살로 이름 높다.

중국을 문명이라고 할 때 늘 그 새벽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캄캄한 하늘에 조그만 빛줄기가 비치는 여명(黎明)의 동이 터올 무렵,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아주 이른 새벽에 그곳의 문명은 과연 어떤 모습들을 빚었을까.


그 자세한 풍경을 고증할 방법은 별로 없다. 문명의 새벽을 알렸던 문자의 태동에서 우리는 희미한 그 흔적을 어렵게 좇아나갈 뿐이다. 그러나 무렵에도 피의 흔적은 완연했다. 초기 한자 갑골문(甲骨文)에 담긴 제례(祭禮)와 주술(呪術), 나아가 잔혹한 전쟁과 죽음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목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그 뒤에 이어진 중국 문명의 아침, 춘추와 전국의 시대에는 우선 전란이 빗발치듯 닥쳤다. 그 아침은 제법 소란스러웠다. 백화제방(百花齊放)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활력 뒤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권력을 두고 벌이는 크고 작은 나라의 내분(內紛)은 오히려 가벼웠다.


중원의 복판에 서기 위해 제후국들은 끊임없는 싸움에 들어갔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작은 나라는 다시 저보다 더 작은 나라를 늘 침범하며 능욕했다. 싸움은 싸움을 낳고, 다시 하염없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런 간단없는 싸움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신중한 사유체계로 이어졌음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제후들 중원 둘러싸고 싸움 또 싸움춘추시대 300여 년 동안 벌어진 전쟁의 기록은 통계마다 조금씩의 차이를 보인다. 한 통계에 따르면 춘추시대를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76년으로 잡았을 때, 그 294년 동안 벌어진 군사적 행동은 483차례, 대규모 전쟁은 376차례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전국시대의 전쟁 횟수는 조금 줄어든다. 7개 제후국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국면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규모는 춘추시대에 비해 더 혹심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횟수는 줄어든 대신 훨씬 가혹한 전란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보통 중국의 역사는 4000년으로 잡는 게 정설이다. 아직 고증을 마치지 못한 일부 설화 시대의 역사를 조금 덧붙인 수치다. 그 만장한 중국의 역사 속에서 벌어진 전쟁은 얼마에 이를까. 역시 거시적인 중국 역사를 연구한 학자의 통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문헌에 적힌 전쟁의 횟수를 따지는 방식이다. 문헌에 적을 정도면 제법 큰 규모의 싸움일 것이다.


그 통계에 따르면 중국 4000년 역사에서 문헌에 기록할 만한 제법 큰 규모의 싸움, 즉 전쟁의 횟수는 약 3700차례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중국은 넓다. 그 드넓은 대지에서 벌어진 다툼을 일일이 기록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문헌은 커다란 규모로 벌어져 수많은 인명의 살상을 부른 전쟁을 기록했을진대, 횟수가 3700번이라면 눈을 씻고 다시 들여다 볼 대목이다.


아무튼 중국의 장구하면서도 모진 전쟁의 역사는 춘추와 전국이라고 하는 문명의 이른 아침 무렵에 벌써 도지고 또 도졌던 셈이다. 이 대목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믿기지 않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이 입에 자주 올리는 유명한 어구가 하나 있다. “차라리 태평한 시절의 개로 살지언정, 난세의 사람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한자로 적으면 “寧爲太平狗, 不作亂世人(녕위태평구, 불작난세인)”이라는 구절이다. 이 말 자체의 판본은 하나가 아니다. 민간에서 오래 흘러 전해진 말인데, 원전을 찾아보면 제법 유래가 깊다.

중국 역사에 늘 닥쳤던 혹심한 전쟁의 한 장면. 청나라 때의 그림.

과(戈). 춘추전국 등 중국 고대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무기의 일종. [중국고병기수장망]

“지는 해 피보다 붉으니 백골은 천리 벌판에”초기 통일 왕조인 한(漢)나라 때의 민간 시가를 모았던 『악부시(樂府詩)』에 등장한다. 그 시 한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싸움터로 지는 해는 피보다 붉으니, 백골은 천리의 거친 벌판에 널려 있구나(沙場殘陽紅似血, 白骨千里露荒野)”. 첫 구절부터가 심상치 않다.


그 시는 다시 처참한 광경을 적어가다가 문득 “차라리 태평시절의 개로 살지언정, 난리판의 사람으로 살지 말라(寧爲太平犬, 莫作亂離人)”는 충고를 던진다. 앞서 소개한 구절과 뜻의 맥락은 같다. 단지 글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런 한나라 때의 시에 드러난 전쟁의 혐오감과 염증이 결국 민간이 즐겨 사용하는 위의 구절로 정착했을 것이다. 중국 문명의 해가 점차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던 무렵의 광경은 춘추와 전국시대에 비해 더 구체적이다. 그 즈음의 중국에는 역시 종전과 마찬가지로 참혹한 싸움이 이어졌고, 강도는 더욱 세졌다. 중국의 판도를 처음 통일의 국면으로 조성했던 나라는 진(秦)이고, 그 우두머리는 우리가 진시황(秦始皇)으로 부른다.


진시황은 중국 최초 통일왕조를 형성한 인물이라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가 통일을 위해 수행했던 전쟁의 결과는 아주 참혹했다. 당시 통일 판도에 들어간 나라는 진을 포함해 7개 국가였다. 인구는 약 100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시황의 통일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의 수는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다. 단지, 서진(西晋) 때의 학자 황보밀(皇甫謐 215~282년)이 자신의 저서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추정한 내용에 따르면 “인구의 3분의 2가 죽거나 다쳤다”고 나온다.


다시 하나의 증언을 곁들이자. 우리도 자주 쓰는 말에 수급(首級)이라는 단어가 있다. ‘잘린 목’을 일컫는 말이다. 처형당한 사람의 목도 그에 해당하지만, 정확하게는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 참수한 뒤 얻은 목이다. 그를 기준으로 벼슬자리의 진급(進級) 여부를 결정해 말 자체도 목에 따르는 직급, 곧 수급(首級)이라고 했다. 바로 진시황의 진나라 전통이었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일컫는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런 수급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건넨다.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의 이야기다. 그는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던 진나라 최고의 장수였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韓)과 위(魏)의 연합군과 싸움을 벌인다. 그 전쟁에서 백기는 24만의 수급을 얻었다고 했다.


이어 벌어진 추가 전쟁에서도 백기는 잔혹한 도성(屠城)의 역사를 이어갔다. 수급을 더 얻었을 뿐 아니라, 2만 정도의 포로를 강에 던져 죽였다고도 한다. 조(趙)나라와 장평(長平)이라는 곳에서 벌인 대회전을 승리로 이끈 뒤 조나라 병사 40만을 산 채로 묻었다고 사마천은 전하고 있다. 백기라는 한 장수가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수행한 통일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따라서 9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진시황의 통일 과정과 그에 수반했던 수많은 살육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그 뒤에 등장한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을 비롯해 왕조의 권력자로 등극했던 수많은 제왕(帝王)은 이름이 거창했을 뿐이지 그 실제 면모는 잔혹한 살수(殺手)였다.


『추악한 중국인』이라는 책을 지어 유명해진 보양(柏楊)이라는 학자가 낸 통계를 소개한다. 그는 서한(西漢 BC202~AD8년)이 몰락하고 다시 동한(東漢 25~220년)이 들어서던 무렵에 주목했다. 극심한 왕조 분열기를 거쳐 다시 통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이런 때의 상황은 바로 난세(亂世)이자, 난리(亂離)의 한복판일 수밖에 없었다.


왕망(王莽)이라는 인물이 서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웠으나 그 명맥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어 동한(東漢)이 들어서기까지 약 21년 동안 전쟁이 벌어진다. 명분은 ‘통일’이었으나 실제 그 내용은 참혹한 ‘학살’이었다. 보양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수도 장안과 그 밖의 16군(郡) 인구 평균 감소율을 77%에 이르렀다. 장안의 인구는 전쟁 전 68만2000명, 전쟁 후의 인구는 28만6000명, 58%가 줄었다. 가장 많이 줄어든 곳은 지금 내몽골 준가르 서남 지역으로 전쟁 전에는 69만9000명이었으나 전쟁 뒤 2만1000명으로 97%가 감소했다. 전국 인구는 전쟁 전 600만5000명이었으나 전쟁 뒤는 83만4400명이다. 약 517만 명이 왕조 교체기의 전란으로 죽었는데, 전쟁에 참전한 군사 및 굶주림과 병을 얻어 죽은 사람 외의 모두는 도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양 『中國人史綱』)


수도 장안과 16개 군 인구 평균감소율 77%중국의 전통 한문(漢文)에는 부풀려 대상을 표현하는 선염(渲染)의 기법이 흔하다. 조금 나이 들어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상태를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당나라 천재 시인 이백(李白)이 그 주인공이다. ‘삼천장(三千丈)’이라고 하면 요즘 길이 단위를 적용할 때 약 3㎞에 이른다. 흰머리가 3㎞라고 적으니 보통의 부풀림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태평시절의 개로 살지언정…”이라거나, “싸움터에 지는 해는 핏빛, 백골이 천리의 거친 들판에 깔려 있다”식의 표현도 의심해 볼 만하다. 그래서 ‘흰머리 3㎞’와 위의 두 표현을 동렬에 넣은 뒤 ‘또 중국식 허풍이지’라며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사를 뒤적이면 위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격렬한 싸움, 도성의 기록, 전란을 피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 이어졌음을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눈길이 그 점에 닿지 못했을 뿐이다. 중국의 대지에는 그런 피바람이 늘 닥쳤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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