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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부대 출현에 마지노선만 믿다 무너진 프랑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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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23면

1940년 5월 13일 독일과 벨기에·프랑스에 걸쳐 있는 아르덴느 삼림지대. 어두운 숲에서 수많은 독일군과 전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3일 전 북쪽에서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를 막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연합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아르덴느는 숲이 빽빽하고 길이 좁은 고원지역이다. 전차나 차량은커녕 대규모 보병 부대의 이동도 쉽지 않다. 때문에 2선급 부대를 배치한 이곳의 방어선은 허술했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도 이 지역엔 없었다.


연합군은 1차 대전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독일군 주력이 평탄한 벨기에 북부 평야를 통해 프랑스를 노리는 시나리오다. 이에 따라 5월 10일 독일군이 첫 공격을 시작하자 150만 명 이상의 정예 병력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진군해 방어선을 쳤다. 이 때 아르덴느 숲에서 튀어나온 독일군은 유령처럼 보였다. 기습을 당한 연합군 전선은 금세 뚫렸다. 간혹 저항하는 거점은 3호 전차와 보병, 융커스(Ju)87 슈투카 급강하폭격기가 어우러진 협동작전으로 분쇄됐다. 예상을 뛰어넘는 독일군의 진격속도에 연합군은 심리적 마비상태에 빠졌다. 참호에 있던 소총수부터 파리의 총사령부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어쩔 줄을 몰랐다. 싸우지 않고 달아나거나 항복하는 병사와 부대가 속출했다.

1 독일군 전격전에서 하늘을 책임진 급강하폭격기 슈투카.

미국 패튼, 프랑스 드골도 전격전 연구일주일 만인 5월 20일 첫 독일군 부대가 영불해협에 도달했다. 영국군 중심의 30여만명이 됭케르크의 작은 교두보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6월 4일 영국군이 해상으로 철수하면서 사실상 프랑스는 붕괴됐다. 6월 14일 무방비 도시로 선언된 파리에 독일군이 입성하고, 22일 공식 항복이 이뤄졌다. 세계 최대의 육군국인 프랑스가 무너지는 데 단 6주가 걸렸다. 그나마 전투가 벌어진 기간은 첫 2주에 불과했다.


개전 당시 양측의 전력을 감안하면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결과였다. 프랑스·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독일군과 비슷한 144개 사단, 330만 병력을 배치했다. 전차는 3400대를 보유해 독일군보다 1000대 가량 많았다. 주포의 크기나 방어력도 연합군 전차가 대개 우세했다. 대포는 2대 1로 독일군을 압도했다. 독일이 앞섰던 건 공군력 뿐이었다. 그럼에도 싸움이 워낙 일방적이고 단기간에 끝나자 전 세계는 독일군의 능력에 전율했다. 무적의 전차 군단과 공군력을 집중 운용해 적의 주력을 단번에 포위 섬멸한다는 ?전격전(Blitzkrieg)?이란 용어가 이 때 탄생했다. 이후 발칸반도 점령, 소련 침공 초기 승리 등이 이어지며 전격전은 독일군의 트레이드마크이자 필승전략이 됐다.


사실 독일도 이런 대승리를 예상하진 못했다. 불과 반년 전인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은 전차 하나 제대로 없던 폴란드군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렸다. 프랑스와 영국군의 전력은 폴란드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독일군으로선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 국경 지대에서 발이 묶여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한 1차 대전의 악몽을 되풀이할까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단 2주만에 완벽한 승리를 달성했으니 독일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던 것 같다. 작전 초기 독일군이 예상 밖으로 빠르게 전진하자 히틀러와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적의 함정은 아닐까” “선봉부대가 고립돼 섬멸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에 밤잠을 못이뤘다. 작전 계획의 속도를 훌쩍 뛰어넘어 질주하던 에르빈 롬멜 7기갑사단장은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는 정지 명령을 끊임 없이 받아야 했다.


전격전의 일등 공신은 하인츠 구데리안 소장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 중장이었다. 전차가 1차 대전 때 등장한 뒤 각국에선 이를 공격의 주축으로 삼아 제병협동전술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영국의 풀러나 리델 하트가 일찍이 이를 이론화했고, 미국의 패튼과 프랑스의 드골 같은 소장파 장교들이 이를 지지했다.

2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군이 전차를 앞세워 진격하고 있다

750㎞ 방어선 믿고 새로운 전략에 소흘하지만 보수적인 군 수뇌부들은 전차를 움직이는 대포라고 여겼다. 보병을 따라다니며 지원하는 무기일 뿐이었다. 구데리안의 환경은 상대적으로 나았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10만명에 묶여 있던 독일군을 재건해야 했던 히틀러가 기계화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구데리안은 보병과 포병·공병·공군의 지원을 받는 전차부대의 운용법을 꾸준히 개발했다. 지휘·통제와 협동 작전을 위해 무전기가 필수라는 점을 알아채고 모든 전차에 장비한 것도 그였다. 개별적으론 성능이 떨어졌던 독일 전차가 프랑스 전투 내내 연합군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전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 구데리안은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갖춘 전차부대를 군단급 이상의 대규모로 편성해 적의 후방 깊숙이 침투시키는 전술을 완성했다. 하지만 독일군 지휘부 역시 이런 전술을 너무 모험적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당초 프랑스 침공 계획은 1차 대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때 히틀러를 설득해 아르덴느를 통한 구데리안식 전격전을 채택하도록 한 사람이 만슈타인이었다.


전격전 신화의 완성엔 프랑스의 퇴행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1차 대전에서 승전했지만 주 전장인 북서부 국경지대는 폐허가 됐다. 이 때문에 “한 치의 땅도 뺏겨선 안된다” “프랑스 내에서 싸워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정치권과 군부에 팽배했다. 이 결과가 ‘사상 최대의 바보짓’이라 불리는 마지노선 건설로 나타났다. 육군성 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에서 유래한 방어선이 1920년대 후반부터 스위스에서 룩셈부르크에 이르는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750㎞에 이르는 마지노선은 콘크리트 요새와 대전차 장애물, 해자 등이 결합된 강력한 방어선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할 즈음엔 대부분이 완성된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직접 프랑스 땅으로 들어오는 건 마지노선으로 막고, 벨기에로 대병력을 투입에 독일군을 분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혼자만의 달콤한 꿈이었다. 아르덴느라는 아킬레스건을 찔린 프랑스는 단박에 무너졌다.

프랑스가 항복한 직후인 1940년 6월 23일 파리를 방문한 히틀러(사진 가운데)가 에펠탑 앞에 섰다.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원조 포탈 야후, PC 고집하다 모바일 놓쳐원조 포털로 한때 인터넷 세상을 지배했던 야후의 몰락은 전격전에 휘말린 프랑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야후는 1994년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중국계 미국인 제리 양이 동료인 데이비드 파일로와 함께 창업했다. 구글이 나오기 전까지는 웹 검색의 대명사로 인식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야후의 무기는 다양한 웹 페이지를 차곡차곡 모아 놓은 디렉토리 서비스다.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것처럼 야후만 검색하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어 웹으로 향하는 관문(포탈)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98년 스탠퍼드대 후배들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구글을 창업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구글의 신무기는 강력한 검색 기능이다. 야후처럼 디렉토리를 뒤질 필요 없이 검색창에 원하는 단어를 넣으면 가장 적합한 페이지와 문서로 바로 안내한 것이다. 돈을 내면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배치해 준 야후와는 달리 구글은 이용자들이 자주 찾는 페이지일수록 중요도가 높아지는 페이지 랭크 시스템을 적용했다. 사용자가 늘어날 수록 더 정교한 검색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모바일 시대에도 대응하지 못하고 개인용 컴퓨터(PC)만 고집한 것도 야후의 몰락을 재촉했다. 잘 정비된 디렉토리와 포탈이라는 마지노선은 검색과 모바일이라는 신무기를 앞세운 구글의 전격전에 대응하는 데 무용지물이었다. 2005년 구글에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준 야후는 결국 지난달 검색·뉴스·이메일 등 핵심 사업에 대한 매각에 나섰다. 야후는 사실상 사라지고, 일본 야후재팬과 중국 알리바바 지분만 가진 투자회사가 되는 것이다.


전 세계 검색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구글이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가 중국(바이두)·러시아(얀덱스)·한국(네이버)이다. 자국어 콘텐트와 정부의 지원·통제를 바탕으로 구글과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콘텐트를 모아 놓은 포탈 서비스로 구글의 검색과 경쟁하는 것은 야후처럼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 알파고에서 본 것 처럼 구글의 인공지능(AI)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이를 활용한 한국어 음성 인식과 검색 기능이 강화될수록 네이버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지는데 갈 길은 멀다. 한글이라는 마지노선만 믿고 야후의 길을 걷고 있는 네이버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나현철 논설위원?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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