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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경력, 8년 만의 재도전 … 닉슨 연상되는 힐러리 행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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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호 22면


3월 1일 수퍼 화요일을 지나고 15일 미니 수퍼 화요일을 앞둔 상황에서 미국 대선 후보 경선 상황이 더욱 긴박해지고 있다. 대의원 배분에 있어 승자독식 방식을 택한 플로리다와 오하이오주에서 15일 도널드 트럼프가 모두 승리한다면 공화당 후보 경선은 끝난 거나 다름 없어진다. 자신의 출신 주인 플로리다에서 패배하느니 그 전에 후보 사퇴하는 편이 낫다는 압력과 회유로 인해 마크 루비오 캠프는 곤혹스럽다. 여전히 마땅치 않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주)을 트럼프 대항마로 품어야 하는 상황이 공화당 주류 입장에서는 괴롭다. 그 동안 민주당의 뉴딜 시대 소수 인종 정책들로 인해 소외당했고, 이후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시대에는 금융자본주의 때문에 버림받았던 미국의 백인 서민층(white working-class)을 집단 반격에 나서도록 총 결집한 트럼프의 경쟁력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이다. 결국 큰 정부와 작은 정부 모두 경험해 보았던 미국 국민들이 이제는 정책(idea) 선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흑인·라티노·동성애자·백인·아시아계가 각자 정체성(identity)대로 후보를 고르는 편가르기 유혹에 빠져 들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미국은 어떻게 선거를 통해 새로운 리더들을 가려내고 정치를 바꾸어 가는 걸까.

※선거인단이 확정되는 본선거일에 사실상 대통령 확정됨

지도자 선출에 익숙한 선거의 나라미국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나라가 근본적으로 선거의 나라인 점을 기억해야 한다. 1789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번도 대통령과 의회 선거를 미루거나 거른 적이 없는 미국민들은 지도자 선출에 무척이나 익숙하다. 전쟁이건 불황이건 상관없이 2년마다 꼬박꼬박 임기 2년의 하원의원 전체와 임기 6년의 상원 의원 100명 중 3분의 1을 새로 뽑고, 4년에 한 번씩은 대통령을 새로 정한다. 게다가 50개 주마다 각자의 스케줄대로 주 단위 별 의회와 주지사를 따로 선출하고, 교육행정 구역마다 교육감을 뽑으며, 주 검찰총장마저 주민 손으로 임명한다.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를 건국 이래 원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1845년 이후 4년마다 11월의 2∼8일 사이 화요일에 전국적으로 어김없이 대선을 실시하고 있다. 대통령의 3선 도전에 대한 헌법적 금지는 195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고, 대통령이 탄핵되더라도 부통령 이하 승계 순서가 지켜짐에 따라 다음 대통령 선출 때까지 정치 스케줄이 고정되어 있다. 삼권분립으로 인해 대통령의 의회 해산이 불가능한 미국은 결국 선거에 의한, 선거를 위한, 선거의 나라이다. 적어도 민주주의와 선거의 역사만큼은 어느 나라보다 장구한 미국의 경우 후보 동향과 선거 판세를 지나간 과거 사례와 비교해 보면 미래가 조금 더 잘 보인다.


올해 대선 후보들 면면을 역사적으로 유추해 보자.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소득 구조를 개선하고, 독점적 기업 세력을 타파하며, 무모한 국제정치 개입을 반대하면서 가는 곳마다 격정적인 웅변술로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 내는 대선 주자는 누구일까.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대항마로 떠오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주)을 연상하기 쉽지만, 실은 1896년 대선에 출마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1860~1925) 후보의 얘기이기도 하다. 1880년대 남북전쟁의 후유증이 정치적으로 마무리된 후 미국은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대규모 상공업 중심 경제로 탈바꿈하면서 도시화?금융화 시기를 지나가게 된다. 이 때 불거진 빈민 문제, 독과점 문제, 양극화 문제 해결을 화두로 당시 윌리엄 맥킨리 공화당 후보에 맞서 대권 경쟁을 벌인 민주당 후보가 바로 브라이언 하원의원이다. 은본위제도 도입을 통해 깊은 부채의 늪에 허덕이는 농민들과 빈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전면적인 소득세 도입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자고 주창한 브라이언의 사자후(獅子吼) 연설에 사람들은 크게 열광하였다. 비록 1896년 대선 패배 이후 두 번에 걸친 대권 도전에서도 연이어 낙선했던 그는 1915년엔 전쟁 개입 금지와 고립주의 정책이라는 평소의 정치 철학을 이유로 두말없이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기도 하였다. 2016년 현재 월스트리트 규제와 부의 편중 해소, 그리고 무모한 정권 교체(regime change)를 목표로 하는 외교정책 반대를 내건 캠페인 중인 웅변가 샌더스 후보가 브라이언의 정치적 실패를 거울로 삼는다면 어떨까.


힐러리와 짝을 이루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는 공화당 소속이긴 하지만 리차드 닉슨(Nixon)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대통령 부인, 뉴욕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 등 화려한 정치적 경력을 쌓은 힐러리와 비슷하게 닉슨도 하원의원부터 시작해서 캘리포니아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8년을 지낸 바 있다. 2008년 자신의 순서라 여겨 온 대권이 흑인 정치 신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으로 인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했던 힐러리다. 마찬가지로 현직 부통령이던 닉슨도 1960년 처음 도입된 생중계 TV 후보 토론회에서 잘 생긴 43세의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때문에 의외의 일격을 당한 바 있다. 경선 막판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든 접전 끝에 오바마에게 후보 자리를 내 주고 만 힐러리가 보기에 1960년 대선 당시 불과 0.2%포인트의 표 차로 케네디에게 석패한 닉슨의 경우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힐러리와 닉슨의 공통점은 각자 대권 도전 실패 이후 8년 만에 다시 재기를 노린다는 점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해 1974년 결국 스스로 사임해야 했던 닉슨과 마찬가지로 지도자 신뢰도에서 낮은 평가로 고전하는 힐러리가 닉슨처럼 경험과 겸손을 앞세워 마침내 대권을 거머쥘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당선된다면 닉슨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정직하고 신뢰받는 대통령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11일(현지시간)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공화당 경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위자가 그의 이름이 적힌 팜플렛을 찢어 보이고 있다. [AP=뉴시스]

골드워터와 닮은 트럼프 후보현재 후보들 중 단연코 쉽지 않은 비교 사례는 역시 트럼프이다. 우선 1988년 민주당 경선과 비교해 보면 앨 고어 상원의원과 제시 잭슨 목사가 남부 대의원 표를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바람에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가 결국 민주당 후보가 되었던 점이 현재 루비오와 크루즈와의 3자 대결에서 트럼프가 이득을 얻고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경우 1964년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가 현직 린든 존슨 민주당 대통령에게 크게 패했던 베리 골드워터(Goldwater) 상원 의원과 유사한 점이 눈길을 끈다. 골드워터는 공화당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극단적 자유의 수호는 악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였고,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는 그가 옳다는 것을 안다”는 문구를 캠페인 슬로건으로 정해 대대적으로 선전한 바 있다. 직선적이고 대담한 골드워터가 소련과 무모한 핵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는 존슨 대통령의 효과적 TV 선거 광고로 인해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더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아버지 조지 롬니 당시 미시간 주지사가 골드워터의 인권법 반대를 이유로 소속당 대선 주자를 대놓고 비판했던 것처럼 그의 아들이자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밋 롬니가 현재 선두주자 트럼프를 공격하는 선봉장 역할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골드워터 상원의원은 모든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인정하듯, 공화당이 이후 이념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는데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현재로서는 트럼프의 본선 경쟁력이 높지 않지만 적어도 대권 후보가 된다면 80년대 이후 지속되어 온 레이건 공화당을 새로운 정당으로 변모시키는데 부동산 재벌이 미칠 파급력이 어느 정도일지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트럼프 역풍에 ‘레이건 공화당’ 바뀌나개별 후보들의 성공 혹은 실패 가능성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점은 과연 2016년 대선이 미국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을 것인지의 여부다. 미국이 선거의 나라이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선거가 다 똑같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1788년 이래 총 57차례 치른 대선 중 최초의 정권 교체 선거인 1800년 대선, 대중민주주의 시대를 연 1828년 선거, 노예제의 종말을 고하게 만든 1860년 선거, 미국 경제의 방향을 산업 자본주의로 결정한 1896년 선거, 적극적 정부와 뉴딜 시대를 가능케 했던 1932년 선거, 다시 전통적 작은 정부로 회귀토록 만든 1980년 대선 등이 소위 ‘중요 선거(critical elections)’로 분류되곤 한다.


트럼프 후보의 약진으로 현재의 레이건 공화당 시대가 이번 대선을 통해 크게 바뀐다면 이는 민주당내 진보파인 샌더스의 정치적 미래와도 관련이 깊다. 힐러리만 해도 안보와 경제 관련 정책에서 90년대 빌 클린턴처럼 중도의 길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과 정치의 비극 관점에서 볼 때 샌더스 후보의 성공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오직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이라고 외친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이나 미국을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shining city on a hill)”에 비유한 레이건의 1989년 고별 메시지는 사실 구체적인 정책 대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리더십이 제시한 것은 증세나 규제 등이 아니라 국민들 마음에 대한 위로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었다.


우리 모두는 정직한 정치인을 갈망하지만 그가 보여 주는 정치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불편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바로 정치의 비극이다. 다시 말해 샌더스가 내건 전 국민 의료보험과 주립대 무상 교육 등 진보적인 정책은 미국민 전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금 증액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진실, 그리고 그 부담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져야 한다고 모든 사람이 믿고 있는 정치적 현실이 엄연하다. 정치 개혁은 그래서 늘 어렵다.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따라가고 싶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동시에 마음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2008년 이후 투표소에 덜 나오는 있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샌더스의 불끈 쥔 두 주먹과 화난 외침보다는 유머와 너털웃음으로 인간적 매력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서정건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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