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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 Ringer 인문산책] 실크로드 거쳐간 첫 삼장법사 ‘공(空)’ 중심 대승불교의 큰길을 열다

중앙선데이

입력

최초의 삼장법사로 불리는 승려 구마라즙의 동상. [wikimedia commons]

승려 쿠마라지바(Kum?raj?va·350~409)는 구마라즙(鳩摩羅什)이나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로 옮겨졌고 줄여서 라즙(羅什)이라 부른다. 그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주요 거점 나라인 중앙아시아 쿠차국(龜玆國·Kucha) 출신이다. 쿠차국은 톈산산맥 남로에 위치한 왕국으로 항상 흉노와 중국의 위협 속에 있었고, 현재는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실크로드는 불교가 전래된 길이라는 뜻에서 다르마 로드(Dharma Road)라고도 불렸다. 이 길을 따라 동아시아의 수많은 구법승과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전법승이 오갔다. 현재 쿠차는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계 위구르 민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라즙이 활동하던 4세기에는 유럽계 인종의 불교왕국이었다.


파란만장한 생애라즙의 아버지는 쿠차로 이주한 인도 출신으로 왕의 여동생과 결혼해 라즙을 낳았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아홉 살에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어머니와 함께 편력하며 불교를 공부했다. 어린 라즙의 암기 능력과 이해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하루에 많은 분량의 경전을 암송하고 대론에도 뛰어나 그를 굴복시킨 자는 한 명도 없었다. 20세가 될 즈음 그의 명성은 멀리 중국에까지 퍼졌다.4세기 북중국에서는 티베트계가 세운 전진(前秦)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전진의 부견왕은 북인도의 카슈미르 출신 승려들이 장안에서 경전을 번역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라즙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나라로 초대하려 했으나 쿠차국이 이를 거절했다. 이를 빌미로 382년 장군 여광(呂光)을 보내 쿠차국을 멸하고 라즙을 데려오도록 한다. 결국 전쟁에 진 쿠차왕은 살해되고 라즙은 포로로 사로잡혀 연행됐다. 하지만 도중에 부견이 죽고 전진 또한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광은 양주에 이르러 후량국을 세웠다. 라즙은 어쩔 수 없이 17년간 여광의 후량국에 억류되고 만다. 부견과 달리 구마라즙의 가치를 몰랐던 여광은 라즙을 소나 말에 태워 떨어뜨려 놀리거나 협박해 여자와 강제로 합방시키는 등 여흥거리로 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오랜 유폐 생활을 통해 라즙은 중국어를 학습할 수 있었다.후진(後秦)의 요흥 황제는 전진을 계승해 불교 진흥에 열렬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 역사상 불교 지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시기라 한다. 수도 장안에서 이미 많은 외국인 출신 승려가 활동하고 있었다. 요흥 또한 라즙을 장안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격노한 요흥은 401년 후량국을 멸망시킨다. 이처럼 라즙은 두 나라의 멸망과 관련돼 있다. 당시 국가 간 명승(名僧) 유치는 대단히 경쟁적이었다. 명승은 한반도 역사에서도 국사로 예우되었듯이 왕권을 격상시키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승려는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종교적 역할뿐 아니라 정치 및 군사 고문 역할까지 담당했다. 라즙 역시 군사고문이 될까 두려워 보내지 않은 것이다.

구마라즙의 모국인 중앙아시아 쿠차의 키질 석굴. [wikimedia commons]


극락(極樂), 색즉시공(色卽是空) 등 단어 창시라즙은 57세에 이르러 장안에 도착해 국사로 예우받으며 경론을 번역하고 여러 승려들을 지도한다. 그는 천재적인 번역 실력으로 수많은 산스크리트 인도 경전을 짧은 기간에 한역했다.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한자문화권의 불교 경전 상당수가 그의 번역이다. 예를 들면 『아미타경』『마하반야바라밀경』『법화경』『유마경』『대지도론』『중론』등이다. 경전 하나를 번역할 때 적게는 100명에서 2000명이 동참했으며, 번역에는 항상 강설을 겸했다. 그의 문하에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 도생·승조·도융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됐다.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서 삼론종·성실종의 기초는 구마라즙에서 시작된다. 그는 또한 최초의 삼장법사로 불린다. 200년 뒤 현장 등 훗날 많은 삼장이 등장했다. 현재까지도 라즙은 현장과 함께 2대 역성(譯聖)으로 불린다. 그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그는 직역보다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의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장이 주로 직역을 사용한 것과 대비된다. 현재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극락(極樂)’이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등의 수많은 용어들이 그의 번역에서 유래될 정도로 동아시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무엇보다 그로 인해 동아시아 불교가 공(空)을 강조하는 대승불교로 성립됐다. 그는 처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소승불교에 속해 있다가 대승으로 돌아선 이후 대승의 공 사상을 적극 강조했다. 불교 전래 초기 중국에서 큰 영향력을 미친 것만큼이나 이후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셈이다.


동아시아 사상사의 위상 승려로서 라즙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여광에게 붙잡혀 있을 때는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고 취하게 해 쿠차왕의 딸과 합궁시킨다. 이후 요흥은 라즙을 궁녀와 관계하게 해 두 아들을 낳게 한다. 라즙의 천재성에 감탄한 요흥 황제는 라즙 같은 천재들을 얻으려는 우생학적 발상에 의해 따로 방을 지어 10명의 여자와 라즙을 강제로 동침시켜 자식을 낳도록 했다. 하지만 요흥의 기대와 달리 비범한 인물은 탄생하지 않았다.출가자의 성관계는 파계를 의미한다. 라즙은 심정이 편안하지 않았다. 강의 시작에 앞서 늘 “더러운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지만 다만 연꽃만을 취해야지 진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언급으로 가책을 표현했다. 하지만 일부 제자들은 스승인 라즙처럼 취처(娶妻)를 선망했던 모양이다. 이에 라즙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릇에 가득 담긴 날카로운 바늘을 계속해서 집어 삼켰다가 다시 뽑아내는 섬뜩한 마술을 시연한다. 이전에 중앙아시아에서 배운 기술로 처음 본 중국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라즙이 이처럼 할 수 있는 자에게만 취처를 허용한다고 말하니 모두 생각을 바꿨다 한다.라즙은 죽기 직전 “우매한 자로서 많은 불경을 번역했지만 만약 내가 번역한 경론에 틀린 부분이 없다면 사후 화장해도 혀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라 예언한다. 과연 화장한 뒤에도 혀만은 타지 않았다 한다. 라즙은 70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이때 건립된 그의 사리탑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그의 모국 쿠차의 키질 석굴에는 1994년 그의 탄생 1650주년을 기념해 동상이 설립됐다.한반도에서도 신라시대에 이미 라즙의 업적을 찬탄했으며 ?삼국유사?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가 바로 화랑이 아닌 기파랑, 즉 구마라즙을 찬미한 노래라는 주장도 있다(지배선 연세대 교수). 라즙의 다른 음역어가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기 때문이다. 쿠마라지바의 역경과 강설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공적이다. 그의 번역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으며 종국에는 그들을 종교적 구원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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