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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Culture] “눈 오려는 이 저녁, 술 한 잔 드시구려…” 시 한 수로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사라졌다. 전화와 메일과 스마트폰 문자가 편지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편함에서 먼 곳의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하고 봉투를 뜯을 때의 설레는 마음을 어찌 스마트폰 문자가 대신할 수 있으랴. 그 편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마음은 몇 배로 더 설렌다. 옛사람들은 물론 편지도 주고받았지만 시 한 수로 편지를 대신하는 풍류를 즐겼다. 이제 참으로 멋진 옛사람들의 시로 쓴 편지 몇 수를 읽어보기로 한다.


매화에 봄을 담아매화를 꺾었는데 역사(驛使)를 만나(折梅逢驛使)농현(?縣)의 그대에게 부쳐 보내오(寄與?頭人)이곳 강남땅엔 가진 게 없어(江南無所有)애오라지 한 줄기 봄을 드리오(聊贈一枝春)


중국 남북조시대의 육개(陸凱)가 친구인 범엽(范曄)에게 보낸 시다. 육개와 범엽에 관해서는 동명이인이 많아 정확한 고증을 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를 쓸 당시 육개는 강남에 있고 범엽은 북쪽에 있었음이 틀림없다.‘역사(驛使)’는 관청의 공문서 등을 전달하는 사람인데 관리들은 그 편에 개인의 편지나 물건을 같이 보내기도 한다. 강남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를 보고 육개는 먼저 북쪽에 있는 친구 범엽을 생각한다. ‘북쪽엔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겠지. 이 아름다운 꽃을 어찌 나만 보고 있으랴’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매화가지 하나를 꺾어 이 시와 함께 역사 편에 부쳐 보낸다.아마 매화가 범엽에게 도착했을 때 꽃잎은 다 없어지고 가지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꽃잎이 없어진들 어떠랴. 이 시 편지가 매화 꽃잎보다 더 아름다워 친구의 절절한 우정을 가슴 깊이 느꼈을 것이다. 백 마디의 말보다 20개의 글자가 더 감동을 주는 것은 시가 가진 예술적 매력 때문일 것이다.


가을밤의 친구 생각때마침 가을밤 그대가 그리워(懷君屬秋夜)서늘한 하늘 아래 시 읊으며 거닌다오(散步詠凉天)빈 산,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에(空山松子落)깊은 곳에 사는 그대 또한 잠 못 이루겠지요(幽人應未眠)


중당(中唐)의 시인 위응물(韋應物)이 친구 구단(邱丹)에게 시로 써서 보낸 편지다. 당시 구단은 벼슬을 버리고 임평산(臨平山)에 은거하며 도(道)를 닦고 있었다. 이 시의 구조는 전반과 후반으로 교묘하게 나뉘어 있는데 전반 1, 2구는 실경(實景)이고 후반 3, 4구는 허경(虛景), 즉 상상 속의 경치다.시인은 가을밤에 잠을 못 이루고 밖에 나와 시를 읊으며 거닐고 있다. 떠나간 친구가 너무나 그리워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임평산의 친구, 구단 역시 자기를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리라고 상상하는 것이 3, 4구이다. 산속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한 곳일 것이라 상상한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친구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암시다. 말은 짧지만 뜻은 깊고, 화려한 시적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담박하게 쓴 시이지만 친구를 그리는 정이 무르녹아 있다. 이 짧은 시 한 수로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많은 평자들이 이 시를 회인시(懷人詩)의 걸작으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후대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명시가 되어 중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다.


술 한 잔 하지 않으려오?새로 거른 동동주에(綠?新?酒)조그마한 진흙 화로 있소(紅泥小火爐)눈 오려는 이 저녁에(晩來天欲雪)한 잔 하지 않으려오?(能飮一杯無)


이 시는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의 작가 백거이(白居易)가 쓴 시인데 제목은 「문유십구(問劉十九)」, 즉 「유19에게 묻는다」이다. ‘유19’는 유씨 집안 6촌 이내의 19번째 항렬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중국 특유의 표현이다. 시의 창작 시기와 ‘유19’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두 사람이 가까운 친구인 것만은 확실하다.눈이 내리려는 겨울 저녁 술을 새로 걸러놓고 따뜻한 화롯불도 피워놓았다. 이만하면 술 마시기 알맞은 환경이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게 있으니 같이 마실 사람이다. 술은 적어도 두 사람이 마셔야 흥취가 나는 법이다. 누구보다 술을 좋아하는 백거이인지라 아마 가까이 살고 있을 친구에게 하인을 시켜 이 ‘쪽지 시’를 보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 풍류인가?백거이는 평소에 시를 써서 이웃집 노파에게 읽어보게 한 후 노파가 이해하면 그대로 두고 이해하지 못하면 고쳐 썼다고 한다. 그만큼 평이한 말로 쉽게 쓴 것이 백거이 시의 특징이다. 이 시도 아무런 수식 없이 붓 가는 대로 일상 대화하듯이 쓴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의 “한 잔 하지 않으려오?”라는 구절은 시어(詩語)라기보다 구어(口語)에 가깝다. 그러나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 마지막 구절 속에서 친구에 대한 백거이의 따뜻한 정을 읽을 수 있다.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는 것은 이 초청장을 받고 친구가 왔는지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를 받고 초청에 응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아마 그 친구는 즉시 달려왔을 것이다. 밖에는 눈이 내리는데 화롯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며 훈훈한 우정을 나누는 장면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컴퓨터 아닌 육필(肉筆)로 편지를 써서 그리운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어떨까? 기왕이면 기계 냄새 나는 컴퓨터보다 사람 냄새 나는 육필로 쓴 편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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