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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실손보험 도덕적 해이, 보험사는 책임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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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한애란 경제부 기자

한애란
경제부 기자

‘보험은 옛날 보험이 좋다.’ 보험 소비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처음 출시될 땐 좋은 조건이던 상품이 갈수록 보장은 줄고 보험료는 오르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는 신용카드나 은행 예적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보험은 카드·예적금보다 만기가 훨씬 길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한번 상품을 잘못 팔면 그로 인한 손실이 수십 년 이어질 위험이 있다. 생명보험사가 과거 팔았던 7~10%대 확정금리형 상품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그 예다.

문제는 보험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상품설계의 오류가 보험사만 망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수술이 진행 중인 실손의료보험을 보면 그 막대한 파급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각 보험사는 ‘블루오션’이던 실손형 의료비 보장 보험시장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보험만 가입하면 자기 돈 한푼 안 들이고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을 15년 또는 70세 만기로 팔았다. 진료비 부담을 덜게 된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병원 이용을 늘렸다. 의료기관도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급여 항목이어서 단가가 싼 운동치료 대신 비급여 항목이면서 실손보험으로 보장되는 도수치료를 비싼 값에 권했다. 돈이 되자 너도 나도 도수치료 전문병원으로 변신했다. 의료계의 인기 진료과목은 실손보험이 적용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데도 보험사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일부 대형사를 제외하고는 실손보험금 청구 건을 심사할만한 인력과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다. 상품 구조를 손 보려는 의지도 부족했다. 보험사로선 여전히 실손보험은 고객을 끌어들이는데 유용한 상품이었다. 이로 인한 손해는 다른 상품이나 새 가입자에 전가하는 식으로 해결했다. 대신 “일부 가입자와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라고 공격하며 보험사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그동안 실손보험의 부작용은 점점 커져서 이젠 건강보험 재정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실손보험으로 건보 재정 부담이 는다고 지적했던 게 2006년이다. 일찌감치 보험사 스스로 나서서 상품 구조를 뜯어고쳤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뒤늦게 내년 4월부터 특약을 분리한 새 실손보험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가입한 3456만 명 중 상당수가 새 상품으로 갈아타기 전까진 구조 개선의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도수치료로 1000만원 넘는 보험금을 타낸 가입자, 체형교정 프로그램을 통증 치료용으로 속여 보험금을 타낸 의료기관 못지 않게 보험사도 이에 책임이 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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