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공보다 사가 중요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16.12.25 18:38

업데이트 2016.12.26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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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이제 며칠 남지 않은 2016년 하반기 한국 사회를 관통한 핵심 개념은 ‘공과 사의 구분’이었다. 지난 9월 말 시행된 세칭 김영란법은 공의 영역에 사가 개입하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궁극적으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게 입법 취지다. 따라서 직무관련성이 그 핵심 내용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직무관련성을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게 규정해 사의 많은 부분을 공으로 해석한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공사 구분을 없애는 쪽에 더 가까워졌다. 물론 이를 통해 문화심리학적으로 높은 관계주의적 특성을 가진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상사에서 공사 구분에 대해 더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김영란법과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개념은 ‘공과 사의 구분’
선진국들은 어떤 공도 함부로
사적 영역 침범 못하게 체득
우리도 공사 잘 구분하려면
칼퇴근에 연말은 확실히 놀자

공사 혼돈의 정점은 역시 ‘최순실 게이트’다. 아무런 공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속칭 한 강남 아줌마가 대통령과 친분을 이용해 국정을 농단했다. 이전 대통령 시절에도 모두 친인척이나 측근 비리가 있었다. 하지만 공직자가 아닌 개인적 비리의 경우는 주로 뇌물을 받고 인사나 인허가 청탁을 몇 건 하는 정도였지, 이처럼 정책과 인사 등 국정 운영에 광범위하게 개입한 경우는 드물기에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대통령과 그 정부 인사들이 최순실의 개입을 방조한 것을 넘어 심지어 적극 요청한 것으로 보여 국민들은 경악하고 있다. 원래 법과 정부 시스템은 민간인이 불법적으로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만들었는데, 이건 알아서 내준 경우라서 어떤 법을 위반한 것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사가 공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통령이 스스로 공을 사에게 넘긴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은 측근 비리가 아니라, 과연 현 대통령과 정부가 국정을 운영할 자격과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탄핵 위기에 내몰린 거다.

그렇다면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은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아무 자격과 능력이 검증된 바 없는 최순실에게 자신의 연설문을 맡기고 정부 기밀을 알려주고, 최순실과 호스트바 출신까지 포함된 그 측근들의 탐욕과 단견을 철석같이 믿고 국정에 그대로 반영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 어떻게 아직도 나올 수 있나? 세간에는 별 이상한 소문까지 돌지만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일들의 근본에는 공과 사에 대한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는 게 분명하다. 이는 세월호 7시간에 대한 논란에서 밝혀지고 있는 대통령의 집무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공의 영역인 집무실보다는 사의 영역인 관저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대통령의 공적 영역에 사적 민간인의 관여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런 공사 구분의 부재는 박 대통령이 살아온 삶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평생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첫 사회생활을 돌아가신 영부인 대행으로 시작해서, 청와대에서 나와서는 20년 가까이 칩거했다. 원래 정치가 출퇴근 시간이나 확정 업무가 없는 직업이니 정치를 시작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랜 기간 모든 일상은 곧 사이자 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 있든, 낮이건 밤이건, 누구와 함께 있든 나라를 항상 걱정하고 공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니 공과 사의 구분이 왜 중요한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 평생을 최순실과 같은 공식 직함이 없는 측근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으니, 지금 와서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일상 전체가 공과 사가 뒤섞여 있는 삶을 산 것이다.

박 대통령의 경우가 너무 극단적이고 그 결과가 너무 황당하지만, 과연 우리 국민들은 공과 사가 잘 구분된 삶을 살고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도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라고 가르친다. 노동시간은 세계 최고이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직원이 성공할 거라 믿는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인 스마트 기기와 인터넷 보급률은 모든 한국인을 5분 대기조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다가 중요한 공직을 맡으면 저절로 공사 구분이 될 걸로 기대한다. 모두 사가 공에 개입하는 것만 걱정하지, 공이 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선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공사 구분이 약한 거다. 선진국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공사 구분을 할 줄 알겠는가? 어려서 아직 중요한 공을 알기도 전부터 어떠한 공도 자신의 사적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며 공과 사가 다르다는 것을 체득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전쟁을 지시하고도 휴가를 떠난다. 공사 구분의 핵심은 공이 사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과 사가 다르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철저한 사의 보호를 통해 공사 구분을 배우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것도 개인의 사적 영역과 여가 시간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미래는 공사를 잘 구분하는 지도자와 국민들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게 출근과 일보다 퇴근과 여가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다. 연말이다. 확실히 놀자!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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