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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언론 통제하다 부메랑 맞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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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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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인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우리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싸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최순실과 싸웠더라.” 실제 알려진 조선일보의 우병우 부동산 의혹 보도(7월 18일)→청와대의 ‘부패기득권 언론’이란 반격(8월 21일)→송희영 주필 사태(8월 26일)라는 흐름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구도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우병우와 문고리 3인방은 생살이고 최순실은 오장육부다. 생살은 피가 나도 도려낼 수 있지만, 오장육부에는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정목표가 최순실 숨기기?
다음 정권 언론관 괜찮을까

박 대통령은 7월 15~18일 몽골을 방문 중이었다. 그런데 우병우 부동산 의혹이 보도되기 하루 전인 7월 17일 밤 박 대통령 입장에선 (당시엔 보도되지 않았지만) 훨씬 치명적인 사건이 터진다. TV조선이 강남 지하 주차장에서 최순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것이다. 현장 기자는 인터뷰를 시도하며 “김종 차관을 잘 아는가” “차은택 감독도 개입했느냐”고 묻는다. 최순실은 “이 사람들이 왜 이래”라며 카메라를 밀치고 도망친다. 최씨는 문고리 3인방을 거쳐 박 대통령에게 이 소동을 곧바로 보고했을 게 분명하다. 적어도 미르재단이 들통났다는 사실과 함께.

박 대통령 입장에서 우병우는 매우 간단한 사안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몽골 현지에서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이며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증빙자료도 다 있다”며 자신했다. 정말 골치 아픈 건 최씨 사태였다. 조선일보 측은 “박 대통령은 조선일보·TV조선이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고 오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도 전면전을 각오하고 필사적인 보복에 나섰다. 8월 21일 “부패 기득권 언론”이라 포문을 열었고 29일에는 ‘친박 돌격대’인 김진태 의원이 송희영 주필 사건을 폭로했다.

청와대는 잠시 역공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오히려 물밑 흐름은 거세졌다. 8월 26일부터 국내 언론들이 재미(在美)언론의 폭로를 인용해 “최순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개입했다”는 보도를 본격 쏟아낸 것이다. 최씨는 한 발 앞서 불길한 징조를 읽었던 걸까. 9월 3일 몰래 독일로 도망쳐 버렸다. 딸 정유라도 9월 26일 이화여대 특혜 의혹이 보도되자 다음날 휴학계를 내고 독일로 건너갔다. 청와대만 한사코 “최순실 의혹은 일방적 추측 기사”라며 버텼다.

돌아보면 박 대통령은 지난 4년간 최고의 국정목표가 최순실 숨기기였다. 비선실세의 역린을 건드리는 언론들은 마구 짓밟았다. 고(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그 비밀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2014년 상반기 ‘정윤회의 딸, 아시안 게임 선발 특혜’를 보도한 시사저널에는 소송 폭탄이 떨어졌다. 세무조사는 물론 가판 판매망까지 경찰수사를 받았다. 그해 11월 ‘십상시 국정 농단’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도 초토화됐다. 편집국 압수수색을 위협하고 통일교 재단까지 세무조사해 재갈을 물려버렸다. 하지만 판세는 지난 10월 24일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JTBC가 국정 농단의 ‘스모킹 건’인 태블릿PC를 보도하면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다.

박 대통령에 비해 미국 트럼프의 대언론 접근은 차원이 다르다. 트럼프는 지난달 22일 대선 과정에서 ‘원수’였던 뉴욕타임스 본사를 찾아가 “뉴욕타임스는 세계의 보석”이라 치켜세웠다. 그 전날에는 주요 방송사 회장 및 간판 앵커들과 비공개 회동을 했다. 지난 18일에는 주요 언론사 평기자들을 ‘오프 더 레코드’를 조건으로 플로리다 저택의 칵테일 파티에 초대했다. 멀고도 가까운 것이다.

박 대통령은 언론을 통제하다 치명적인 부메랑을 맞았다. 과연 다음 정권은 바람직한 정치-언론 관계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가장 앞선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얼마 전 해직기자를 문병한 뒤 “종편의 재인가 기준과 요건을 엄격하게 심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혹 아직도 언론을 정치적 통제수단으로 여기는 게 아닌지 불길하다. 권력과 언론의 기본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서로 정중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앞날은 여전히 노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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