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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엔 촛불 든 이웃에게 온기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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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27면


핀란드를 여행하고 나서 스웨덴이 강국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색상만 다를 뿐 교차점이 왼쪽으로 약간 치우친 십자가를 국기로 쓰고 있어 고만고만한 나라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뚜렷하다.


핀란드는 오랜 세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의 광복절에 클래식 방송에서 반드시 들려주는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는 러시아의 100년 압제에 저항한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스웨덴은 무려 600년간 핀란드를 다스렸다. 시벨리우스도 스웨덴어를 쓰는 핀란드인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내가 경험한 핀란드도 스웨덴의 뿌리가 깊었다. 시골 호텔의 주인은 아버지가 스웨덴 사람이었고 일행을 태우고 다닌 골동품 반열의 오래 된 버스는 스웨덴산 볼보였다. 핀란드 내 스웨덴인은 30만 명 정도지만 이들은 정당을 설립하고 대표자를 내세워 옛 피지배국에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한다. 스웨덴어는 핀란드의 공용어다.


최근에 스웨덴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경험을 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책 『오베라는 남자』 덕분이다. 오베는 먼저 떠난 아내를 따라가기 위해 매일 자살을 준비하고 실행까지 하지만 이웃이 노크를 한다든지, 또는 목에 매단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한다. 북유럽 게르만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로 매우 까칠하고 견실한 것을 좋아한다. 부실한 밧줄 탓에 자살에 실패하고는 “요즘은 밧줄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느냐”고 한탄한다.


오베의 첫 자동차는 아버지가 물려준 고물 사브(Saab) 93이었다. 그는 평생 사브만 탔다. 아버지의 사브가 수명을 다한 뒤에도 사브 96, 사브 900, 사브 9000으로 갈아탔다. 그것은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오베의 이웃에는 루네라는 친구가 살았는데 그는 같은 스웨덴산 볼보를 몰았다. 볼보 244, 볼보 265, 볼보 760…. 두 집 차고에는 스웨덴 양대 자동차 회사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변고가 발생한다. 루네가 독일산 BMW를 산 것이다. 오베는 외친다. “BMW라니! 그런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 어떻게?”


이 부분을 읽다가 사브라는 자동차에 관심이 생겼다. 내 차가 독일산 폭스바겐인데 디젤게이트로 ‘견실한 독일 기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브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자동차였다. 사브는 원래 항공기를 만들던 회사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차를 생산했는데 2000년 미국 포드에 매각되면서 옛 명성을 잃었다. 사브가 경영에 실패한 이유가 ‘안전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었다고 하니 오베같은 스웨덴 사내가 독일차를 우습게 본 것도 이해가 된다.


스웨덴은 음반도 잘 만든다. 마이너 레이블이지만 음질만은 최고인 프로프리우스(proprius)라는 음반사가 있다. 회사 이름에 자부심이 드러난다. 이 라틴어는 ‘고유한 것, 남다른 존재’를 뜻한다.


나는 오래전 이 회사의 대표적 음반 두 장을 LP로 장만해 특별한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에 올리곤 했다. 바리톤 호칸 하게고드의 성가곡집과 색소폰 연주자 돔네루스가 오르간 반주로 연주한 ‘안티폰 블루스’가 그것이다. 하게고드는 ‘O, Helga Natt’(거룩한 밤),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 등 익숙한 곡들을 부르는데, 황금빛 햇살처럼 풍성하고 강인한 음성이 소름을 돋게 한다. 색소폰과 오르간의 이질적인 만남도 우려와 달리 충격적이다. 프로프리우스는 간소한 릴 테이프 녹음기와 한두 개의 마이크로 놀라운 음향을 담아냈다. 명반은 고가의 장비가 아니라 장인의 숙련된 손끝에서 탄생한다.


최근 LP가 리이슈 붐을 이루는 중에 친구가 콕 찍어 사라고 한 음반이 있었다. 흘려듣고 잊었는데 친구는 다시 “샀느냐?”고 확인했다. 리이슈는 소량이라 한 번 놓치면 다시 사기 힘들다. 그제야 주문을 서둘렀는데, 요즘은 매일 그 음반을 돌리고 있다. 스톡홀롬 성당 합창단의 성가곡집 ‘Now the Green Blade Riseth’다. 성가지만 무겁지 않다. 음반 타이틀처럼 푸른 새싹이 돋는 들판의 평화로운 정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다. 반주 악기는 기타·트라이앵글·플루트·리코더 같은 소박한 것들이다.


마지막 곡이 스웨덴 민요 ‘Bred Dina Vida Vingar’다. 호칸 하게고드도 음반 마지막에서 이 노래를 무반주로 부른다. ‘주님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나를 덮어주소서’라는 내용이다. 나는 두 음반 모두 이 곡이 가장 좋다. 가슴이 더워지는 위안을 느낀다. 가을부터 계속되는 국난에 심신이 지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성탄절이다. 그분의 넓은 날개가 촛불을 든 선량한 이웃들을 포근히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온기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의 얼어붙은 심장도 녹여 준다면 더 좋겠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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