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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JP가 의원 5명과 만든 자민련, 15대 총선서 50석 돌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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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보수정당 분열사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27일 둘로 쪼개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탄핵소추 심판에 회부된 데 따른 후폭풍이다. 당내 주류인 친박계 의원들은 박 대통령 탄핵을 막판까지 반대했으나 김무성·유승민 의원 등 비주류 의원들은 국정 농단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며 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다. 양측의 갈등은 결국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지난 21일 탈당을 결의한 새누리당 비주류 의원 30여 명은 27일 집단 탈당계를 낼 예정이다. 가칭 ‘개혁보수신당’이란 이름을 내건 이들은 “추가 탈당 의원을 규합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신당이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를 구성하는 건 확실시된다. 경우에 따라 신당이 국민의당(38석)을 제치고 제3당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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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정당에서 탈당파가 원내교섭단체까지 구성하는 ‘분당’ 사태가 벌어진 건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이다. 1987년 통일민주당(신민당이 모태)과 평화민주당, 2003년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2007년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 2015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분열 등 분당 사태는 현 야권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1990년 민정당(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해 만든 민주자유당. [중앙포토]

1990년 민정당(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해 만든 민주자유당. [중앙포토]

반면 보수정당은 그동안 내분 사태가 벌어져도 이탈 규모는 매우 작았다.

이인제, 경선 불복 후 국민신당 창당
보수 후보 분열로 DJ 당선에 영향
MB 당선 후 총선 때 친박계 공천학살
박근혜 “꼭 살아서 돌아오라” 격려
낙천자들 ‘친박연대’ 꾸려 대거 당선
학계 “비박계의 ‘개혁보수신당’은
보수 분열 아닌 새누리 해체 과정”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보수정당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분열이 발생한 건 95년 민자당에서 김종필(JP) 당시 대표최고위원이 탈당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을 창당했을 때였다. 자민련은 그해 6월 치러진 제1회 전국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 충남·충북·강원 지사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95년 김종필 의원이 충청권을 기반으로 만든 자유민주연합. [중앙포토]

95년 김종필 의원이 충청권을 기반으로 만든 자유민주연합. [중앙포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도 자민련은 충청과 대구·경북(TK)의 반 YS(김영삼 전 대통령) 정서에 기반해 50석이나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한 제3세력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자민련도 처음에 JP와 함께 민자당에서 탈당한 의원은 5명에 불과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현역 여당 의원이 탈당을 해 황무지로 나간다는 건 정치적 생명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서 패한 이인제 후보가 만든 국민신당. [중앙포토]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서 패한 이인제 후보가 만든 국민신당. [중앙포토]

보수정당의 두 번째 조직적 분열은 97년 대선 직전에 발생했다. 그해 9월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했던 이인제 후보가 경선에 불복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당시 그를 따라 나간 의원은 8명이었다. 이인제 후보는 그해 대선에서 492만 표를 얻어 국민회의 김대중(DJ)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로 누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DJ는 JP와 손을 잡은 덕분에 충청권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40만 표를 앞섰다. 이게 고스란히 전체 표차로 연결됐다. 결국 두 번에 걸친 보수 정당의 분열은 정권 교체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2년 2월에도 16대 대선 정국을 맞아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이회창 총재의 독주에 반기를 들고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일이 있다. 하지만 한국미래연합은 사실상 ‘박근혜 1인 정당’이었기 때문에 조직적 분열로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한국미래연합은 그해 6월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자생력을 상실했고, 결국 박 의원은 그해 11월 한나라당과의 합당 형식으로 다시 복당했다.

2008년 한나라당 계파갈등으로 친박계 의원들이 탈당해 꾸린 친박연대. [중앙포토]

2008년 한나라당 계파갈등으로 친박계 의원들이 탈당해 꾸린 친박연대. [중앙포토]

보수정당의 세 번째 조직적 분열은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벌어졌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을 장악한 친이계는 총선 공천 때 김무성·서청원 의원 등 친박계 중진들을 대거 낙천시키는 이른바 ‘공천학살’을 벌였다. 이에 격분한 상당수 친박계는 서청원 의원이 주축이 돼 창당한 ‘친박연대’에 합류했고, 일부는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조직을 꾸려 출마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이 대통령을 비난했고, 친박계 후보들에게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격려했다. 그 결과 친박연대는 14명, 친박 무소속연대는 12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친박계만으로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한 규모가 됐다. 결국 친박계를 배제하고선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와 화해를 선택했고, 친박계와 친박연대 당선자들은 단계적으로 전원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하지만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사활을 건 전쟁을 벌였던 친이계와 친박계는 쉽게 융화하지 못했다.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또다시 정면으로 충돌했고 친이계와 친박계 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후반으로 접어들고, 한나라당이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친이계는 급속히 쇠퇴하고 당내 권력구도는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2012년 총선 때 당권을 거머쥔 박 전 대표 측은 친이계를 대거 잘라내고 당의 친박 색깔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새누리당 전체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친이계가 집단적 반발을 하지 못했다.

현재 새누리당 비주류 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는 가칭 ‘개혁보수신당’ 창당은 87년 개헌 이후 보수 정당의 네 번째 조직적 분열이다. 과거 자민련·국민신당·친박연대는 선거에 대비해 급조한 정당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개혁보수신당’은 창당과 동시에 원내교섭단체가 된다는 점에서 앞서 세 번의 분열에 비해 영향력이 훨씬 크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비주류 의원들이 준비 중인 개혁보수신당(가칭). 김성태, 유승민, 김무성, 황영철(왼쪽부터).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비주류 의원들이 준비 중인 개혁보수신당(가칭). 김성태, 유승민, 김무성, 황영철(왼쪽부터). [뉴시스]

친박계와 비박계의 결별은 직접적으로는 박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입장 차이가 원인이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성향의 보수그룹과 영남·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강경 보수그룹의 충돌이란 분석도 나온다. 개혁보수신당의 간판 격인 유승민 의원은 “안보는 정통보수를 지향하지만 경제·복지·노동 분야는 새누리당보다 훨씬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엔 찬성하면서 재벌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노선이다.

정병국 개혁보수신당 창당준비위원장은 “새누리당은 보수를 대변한다면서 박 대통령의 사당(私黨)이 됐고, 친박은 패권주의로 최순실 국정 농단을 방조해 도덕성과 보수 기반을 통째로 잃었다”고 비판했다.

2004년 이후 새누리당(전신 한나라당 포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박근혜 시대’의 종말이란 해석도 있다. 장훈 중앙대(정치외교학) 교수는 “개혁보수신당의 등장은 보수정당의 분열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수명이 다한 당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지난 10년간 집권했던 새누리당의 힘은 이제 다했고, 새누리당에 남아 있는 친박도 오래지 않아 힘이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 탄핵으로 차기 대선이 확 앞당겨질 가능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보수정당의 분열이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97년 대선 때는 보수정당의 분열로 진보정당이 반사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 진영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된 상태라 경우의 수가 복잡해졌다. 개혁보수신당의 최대 약점은 유력 대선주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직 시나리오 수준이지만 신당이 국민의당과 연대해 제3 지대를 형성하는 그림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대선 직전에 특정 후보를 고리로 새누리당과 재결합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사상 첫 보수정당의 분당 사태는 탄핵 사태와 겹치면서 대선 정국을 더욱 요동치게 하고 있다.

[S BOX] 역대 대통령들 집권말기 줄줄이 탈당, MB만 당적 유지한 채 퇴임

새누리당 윤리위원회는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징계수위를 논의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사흘 만에 열린 윤리위원회에서 7명의 위원은 ‘탈당 권유’로 의견을 모았다. 징계수위를 최종 발표하기 전인 13일 이진곤 전 윤리위원장은 “우리가 탈당을 권유하는 것보다 대통령이 스스로 당적을 정리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당의 오너였던 대통령이 집권 말기에 당에서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야권의 선거중립 요구가 거세지자 그해 10월에 공식 탈당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차남 현철씨의 비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15대 대선 직전인 97년 11월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의 갈등이 결정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최규선 게이트 등 세 아들의 비리 의혹이 잇따라 불거지자 2002년 5월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자신이 만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2월 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당적을 정리했다. 임기 말 지지율이 바닥을 쳐 차기 대선에 부담이 된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88년 11월 5공 청문회를 겪고 민정당을 탈당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당 당적을 유지한 채 퇴임한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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