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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계란 대란 ··· 의사결정이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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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한국과 일본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감염 신고가 접수된 날은 각각 11월 16일(해남군)과 28일(아오모리현).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부산 지역 정치인들의 연루 소문이 나돈 엘시티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법무부에 지시했다. 그 나흘 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긴 3차 촛불 함성의 위협에 자기 딴에는 회심의 역전타를 날린 셈이지만 다시 나흘 뒤 “대통령은 최순실과 공범”이라는 검찰의 발표가 나왔다. 머릿속에 문재인·김무성 같은 정적들을 어떻게 처치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박 대통령이 저 멀리 해남 지방의 철새 문제에 신경을 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관 살처분 하라”는 분노의 소리
감수성·판단·의논 있는 리더 뽑아야

황교안 국무총리가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고, 국회에서 해임 건의안이 통과돼 정책 영향력을 조롱받던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대통령의 운명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번에 새로 나타난 AI 변종 바이러스의 별명은 학살자. 학살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주무 장관이 딴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매뉴얼과 시스템을 뚫고 전국을 신속하게 초토화시켰다.

AI는 분식집 계란말이에 달걀이 한 개씩 덜 들어가고, 대형 마트엔 30개들이 계란 한 판이 자취를 감췄으며, 크리스마스 이후엔 파리바케뜨나 뚜레쥬르에 빵 공급이 여의치 않은 희한한 계란 대란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 한국 닭·오리의 20% 이상이 AI 의심을 받아 살처분됐다. 천안 같은 곳은 80%가 사라져 아예 양계업이 붕괴됐다고 한다. 얼마나 급했으면 모자란 생계란을 호주·브라질·아르헨티나에서 항공기로 수입하기로 했을까. “장관 살처분 하라”는 지인의 분노가 섬뜩하기보다 쓴웃음을 샀다.

AI는 철새들의 겨울 이동경로를 따라 해마다 한국·중국·일본에서 발생하는 동물성 전염병이다. 지금처럼 사회·경제적 계란 대란으로 격상된 적은 없었다. AI와 싸움은 철새들이 날아가면서 도래지에 싸놓은 똥들을 상시적으로 채집, 분석, 예측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상시 예찰(豫察)시스템이라고 한다. 한국에선 연 200억원 예산이 들어간다. 시작할 때는 다들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규모의 돈을 들이는데 나라마다, 정권마다 성과가 다르다.

일본은 어땠을까. 아베 신조 총리는 신고가 접수되고 2시간 만에 위기관리센터를 설치했다. 농림수산성, 환경성, 후생성과 협의하면서 상황을 직접 지휘했다. 자위대 동원령을 내리고 즉각 살처분하도록 했다. 즉각 살처분으로 대량 살처분을 막을 수 있었다. 100만 마리 수준으로 묶었다. ‘즉각’이 AI 감염 속도보다 빨랐던 덕분이다. 자위대 즉각 동원이 가능한 사람은 군 통수권자인 총리뿐이다. 한국처럼 “농식품부(김재수 장관)가 컨트롤타워가 돼 운영하고 저(황교안)는 총리실에서 고심하고 있었다”(20일 황교안 권한대행 국회 답변)는 수준의 저(低)속도, 저의지, 저집행 의사결정 방식으로 군병력을 끌어낼 수는 없다. 하물며 대통령이 권력 생각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그 결과 우리는 34일 만에 2000만 마리를 도살해야 했다. 더 슬프고 절망적인 게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애꿎은 닭들이 죽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AI는 그 자체가 고도의 정책 문제이고 최고 수준의 정치 행위다. AI가 발생할 때 대통령이나 총리가 어떤 정치적 감수성과 정책적 판단력, 의논구조를 갖추느냐에 따라 천차만별 국민생활에 차이가 난다. 국가 간 지도자의 리더십이나 정치 경쟁력, 정부의 실력이 AI 무대에서처럼 적나라하게 비교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 정치는 의사결정이다. 정치가 없으면 의사결정도 없다. 박근혜·최순실 국정파괴 사건은 생존자가 없을 때까지 계속 충돌한 뒤 비로소 멈추는 궤도이탈 열차 같다.

정치의 부재, 의사결정의 진공에서 또 어떤 재앙이 생겨날지 두려울 뿐이다. 지도자 경쟁력, 정치 경쟁력이 민생 경쟁력이란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세밑이다.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 판단력과 의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총리도 지명을 잘해야 한다. 민생 감수성이 높고 장악력 있는 빠릿빠릿한 인물로.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