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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드골 축출 혁명 뒤 드골맨 집권 ‘퐁피두 현상’…긴장하는 야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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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12일 더불어민주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추미애 대표는 “새 인물을 경제부총리로 앉히고 순차적으로 황교안 총리도 물러나게 하자”고 주장했다. 황교안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이건 내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자 우상호 원내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문제는 지도부에 위임해 달라”며 의원총회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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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결국 ‘황교안·유일호 체제 인정’이라는 당론을 발표했다. 강경론자인 추 대표의 생각보다 우 원내대표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다. 탄핵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왜 우 원내대표는 그런 ‘마일드한 선택’을 했을까.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 대표의 말 속에 답이 있다.

87년 6·10항쟁으로 직선제 개헌
야권 후보 단일화 못해 집권 실패
현재 야권 총 지지율 55% 나오지만
“보수, 권력 앞에선 귀신 같은 복원력”

김 전 대표는 요즘 ‘프랑스 68혁명’을 주변에 역설하고 있다.김 전 대표는 18일 본지 통화에서도 “막연하게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으니 자연적으로 대권이 야권에 올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며 “프랑스에서 1968년 혁명이 일어나 드골 대통령이 물러났을 당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고 경고했다. 68년 3월 파리의 대학생들에게서 시작된 시위가 기성질서에 도전하는 혁명으로 번지면서 드골 대통령은 퇴진했다. 당시 ‘주동자 없는 시위’의 양상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촛불 시위와도 닮았다.

하지만 69년 대선에서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은 드골 우파인 조르주 퐁피두 후보였다. 김 전 대표는 그런 ‘퐁피두 현상’의 재연을 우려하고 있다.한국 정치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87년 6·10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운동세력은 5공 정부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얻어냈다. 하지만 6개월 뒤 열린 그해 대선에서 야권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후계자인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지켜봐야 했다. 야권 양대 산맥인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분열 때문이었다. 당시 노 당선자의 지지율은 36.6%로, 김영삼 후보(28.0%)와 김대중 후보(27.0%)의 합인 55.0%보다 18.4%포인트 적었다. 야권의 386세대들에겐 “당시 노태우 대통령 당선은 지금도 일종의 트라우마”(기동민 원내대변인)다. 이런 우려는 386세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민주당 원로인 문희상 의원도 본지와의 통화에서 “4·19 혁명 이후 5·16 군사쿠데타가 있었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가 집권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숫자만 보면 권력 풍향계가 야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난 16일 발표된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40%를 기록했다. 민주당 계열 정당 지지율이 40%대를 찍은 건 최근 15년 이래 없던 일이다. 국민의당과 정의당 지지율(각각 12%, 3%)까지 합치면 야권 지지율은 55%에 이른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지지율 15%에 불과하다. 여기에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분당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야당조차 숫자는 무의미하다는 인식이다. 우 원내대표는 “보수는 권력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정말 귀신같이 자기 복원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당론 결정 과정에서 우 원내대표가 가장 의식하는 것은 ‘역풍’이며, 그것이 황교안 체제 인정의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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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내년도 한반도 주변정세는 불투명 투성이다. 김종인 전 대표는 “내년에는 경제상황도 좋지 않을 텐데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해소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심리가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내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의 동북아 안보정세는 급변을 예고하고 있다. 79년 수교 이후 유지해온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국 신행정부의 대중 강경노선은 한국으로선 처음 부닥치는 안보 환경이다. 외교안보 현안 중 내년 5월 예정인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등에 야권이 어떻게 접근할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차기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7일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다시 6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과 ‘헌법재판소 탄핵 인용’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날 보수단체의 ‘맞불집회’도 열렸다. 대선정국에서 보·혁 대결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전조다. 여당 내분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야권의 수권능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연말까지 이어진다. 이번 임시국회(12월 15~31일)를 소집한 이유이면서도 결론을 내지 못한 ‘여·야·정 협의체’ 발족, 국정 역사교과서 처리, 12월 말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후임 인선 등이 대기하고 있다.

차세현·이지상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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