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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40대 부부 눈물 “동반실직…빈곤층 추락할까 겁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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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젠 민생이다 <1> 꺼져가는 공장 불빛

지난 1일 경남 거제의 한 산업단지 안 대형 크레인 주변의 모습. 일거리가 없어 크레인은 멈춰 서 있고, 작업 인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산업단지엔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협력업체가 밀집해 있지만 조선업 불황으로 두 회사가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상당수 협력업체도 폐업하거나 공장을 멈췄다. [거제=송봉근 기자]

지난 1일 경남 거제의 한 산업단지 안 대형 크레인 주변의 모습. 일거리가 없어 크레인은 멈춰 서 있고, 작업 인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산업단지엔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협력업체가 밀집해 있지만 조선업 불황으로 두 회사가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상당수 협력업체도 폐업하거나 공장을 멈췄다. [거제=송봉근 기자]

“지난 40년간의 삶이 단 6개월 사이 송두리째 바뀌었어요.”

조선 침체로 과장 남편 직장 잃고
유치원 교사 부인, 원아 줄어 실직
“재취업 일자리도 찾기 힘들어”
경남 2만명, 구미 7000명 내몰려
영세 협력업체는 퇴직금 없어
주변 상권·부동산으로 파장 확산
디트로이트처럼 불황 악순환 우려

지난 1일 경남 거제시 ‘조선업 희망센터’에서 만난 천모(40·여)씨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두 달 전까지 영어유치원 부원장으로 일했던 그는 이날 취업교육을 받기 위해 센터를 찾았다. “재취업이 쉽지는 않겠지만 교육이라도 받아야 실업급여가 나온다는 얘기에 6살 딸아이를 부모님께 맡겨두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천씨와 같은 반에서 50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 그중 절반가량은 20~30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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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천 거제고용센터장은 “지금은 하루 평균 150여 명이 센터를 찾아오는데 수가 매달 20~30%가량 늘고 있다”고 말했다. 천씨는 전 세계 ‘조선 1번지’ 거제가 키운 전형적인 ‘거제 키즈(kids)’다. 부친은 거제가 산업단지로 개발된 1970년대부터 삼성중공업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천씨는 “대학 시절 주변에는 외환위기 여파에 부모님이 실직해 어려움을 겪는 친구가 많았지만 거제의 조선소는 건재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냈다”고 말했다. 결혼할 때 남편 역시 삼성중공업 직원이었다. 이후의 삶도 풍요했다. 남편과 맞벌이로 버는 연소득은 억대를 넘었고 아파트도 장만했다.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경남 거제시 조선업희망센터에서 실업급여 신청 요령을 교육받고 있다. 이 희망 센터에는 요즘 매회 80명 이상의 실업자가 몰려 재취업 및 실업 관련 교육을 받는다. [거제=송봉근 기자]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경남 거제시 조선업희망센터에서 실업급여 신청 요령을 교육받고 있다. 이 희망 센터에는 요즘 매회 80명 이상의 실업자가 몰려 재취업 및 실업 관련 교육을 받는다. [거제=송봉근 기자]

하지만 조선업의 침몰과 함께 모든 것이 변했다. 시작은 지난 6월 남편의 갑작스러운 실직이었다. 지난해부터 조선소 실적이 나빠지고 수주가 줄더니 올 들어선 아예 일거리가 없는 날이 늘었다. 결국 회사는 과장급까지 희망퇴직을 확대했고 그의 남편도 대상이 됐다. 불행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삼성중공업과 함께 대우조선해양이 인력 감축에 들어가면서 천씨의 직장인 영어유치원도 직격탄을 맞았다. 유치원생의 부모 대부분이 두 회사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견디지 못한 유치원은 10월 천씨와 같은 교사들을 내보냈다. 넉 달의 시차를 두고 부부가 동시에 직장을 잃었다.

천씨는 “남편이 재취업을 백방으로 "알아보지만 10년 넘게 조선소에서만 일한 탓에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며 “집값까지 떨어져 우리도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게 아닌가 겁이 난다”고 말했다.

올 들어 천씨의 남편처럼 3대 조선사(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에서 퇴직한 인력은 4600여 명이다. 여기에 중소 조선소와 협력업체를 합하면 경남 지역에서만 2만 명 가까운 인력이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란 게 현지의 추산이다. 그나마 희망퇴직금이라도 받은 대기업 출신 근로자들의 형편은 나은 편이다. 상당수 도산한 협력업체 근로자들은 퇴직금조차 챙기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11월 말까지 조선업계 임금 체불액은 78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07억원)보다 93.2% 급증했다. 삼성중공업 협력업체인 신화기업의 박정현 전무는 “거제는 지금이 ‘97년 외환위기’인 셈”이라며 “그간 겪어보지 못한 위기 앞에 지역 전체가 두려움에 빠져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가장 막막한 이들이 일용직 근로자다. 조선업체는 자사 인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주문이 들어왔을 때 임시계약을 맺고 이들을 현장에 투입한다. 이른바 ‘물량팀’이다. 하지만 경기가 나빠지자 일용직 근로자의 일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이수천 센터장은 “소속된 회사가 없으니 실업급여도 받지 못해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라며 “일용직 근로자의 삶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소발 위기는 주변 상권과 부동산 시장으로 빠르게 확산하면서 자동차 산업이 몰락해 무너진 미국 디트로이트처럼 시가 침체의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이달 초 찾은 거제의 중심가인 고현동의 건물 곳곳엔 ‘임대’라고 쓰인 딱지가 붙어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정모(58·여)씨는 “조선소 구조조정 이후 가게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도 “고현동은 물론 조선소 인근인 장승포 등지에도 원룸이 남아 돈다”고 말했다.

문제는 주력 산업의 위기에 지역 전체가 흔들리는 곳이 거제·울산 등 중후장대형 산업 도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축인 전자·정보기술(IT) 산업에서도 공장 해외 이전 등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올 들어선 갤럭시노트7의 판매 중단까지 겹치며 파장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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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탄’을 맞은 대표적 도시는 경북 구미다. 이달 초 찾은 삼성전자 구미2사업장 앞 식당 거리는 썰렁했다. ‘국내산 돼지고기 무한리필 1인당 9900원’이라는 할인 간판만 보였지만 식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일식집을 운영하는 이모(54)씨는 “불황은 심각해지고 임대료 내기도 벅차 가게를 내놨다”며 “그동안 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다가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겁난다”고 말했다. 9월 기준으로 구미 산업단지공단(산단)의 고용 인원은 9만 명으로 2년 전보다 7000여 명 줄었다. 2012~2015년 평균 333억 달러를 유지했던 산단의 수출액도 올해는 300억 달러에 미치지 못할 전망이다.

기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최근 구미에는 디스플레이 기술자를 중국이 5년치 연봉을 한꺼번에 제시하며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관련업계 종사자는 “관련 팀 전체를 데려가기도 한다”고 했다. 조영열 구미시청 투자통상과 신성장전략계장은 “중국이 가격 경쟁력에 이어 기술력에서도 따라 붙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거제의 모습이 구미에서도 재현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거제·구미=이승호·김민상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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