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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이것은 재난 시뮬레이션이다. 영화 '판도라' 박정우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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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경애 (STUDIO 706)


한국영화 최초로 원전 사고를 다룬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12월 7일 개봉). 이 영화의 시작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며 대본을 써 내려간 박정우(47) 감독에게서 출발한다. 변종 기생충이 대도시를 위협하는 이야기에 대해 다룬 재난영화 ‘연가시’(2012)를 연출한 그는, ‘판도라’를 통해 다시 한 번 재난영화를 다루는 남다른 솜씨를 입증했다. 박 감독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을 그린 만큼 ‘사실성’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고 말했다.

사진=정경애(STUDIO 706)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여러 재난을 간접 경험했다. ‘해운대’(2009, 윤제균 감독)와 ‘감기’(2013, 김성수 감독)로 각각 부산을 덮친 무시무시한 쓰나미와 치사율 100% 감기 바이러스를, 올여름에는 ‘부산행’(7월 20일 개봉, 연상호 감독)으로 KTX 열차 안 좀비 떼의 습격을 겪었다. 하지만 ‘판도라’는 그동안 꾸준히 불거졌던 국내 원전의 위험성을 스크린에 투사한다는 점에서, 기존 영화와는 또 다른 생생한 공포를 안긴다. ‘연가시’ ‘판도라’ 등 재난영화 두 편을 잇따라 연출한 박정우 감독은 ‘주유소 습격사건’(1999, 김상진 감독) ‘신라의 달밤’(2001, 김상진 감독) 등 코미디 히트작을 쓴 각본가 출신. 인터뷰 내내 재치 있는 답변으로 응한 박 감독은 국내 원전 문제에 대해서는 따끔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원전 사고를 다루게 된 계기는.
“‘연가시’를 만들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 원전 문제가 전 지구적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유독 우리나라는 이상할 만큼 조용하더라. 이런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에 원전 재난이 일어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그 즈음이다.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고, ‘연가시’보다 더 큰 규모의 재난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완성까지 4년이 걸렸는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내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아는 지식만을 활용해 대충 썼다가는 큰일 날 것 같더라. 그래서 6개월 동안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 등에서 일어난 기존 원전 사고 관련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며 공부했다. ‘도저히 내 실력으로 건드릴 수 없는, 복잡하고 민감한 소재’라는 생각에 잠시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태껏 공부한 게 아까워서 ‘일단 시나리오라도 완성하자’는 생각으로 매달렸다. 2013년 초부터 반년가량 걸려 초고를 완성했고, 시나리오를 읽은 배급사들의 반응이 예상 외로 좋았다. 우여곡절 끝에 투자·배급사 NEW를 만났고, 촬영은 2014년 3월에 시작해 그해 8월에 마무리했다. 이후 1년 반 동안은 CG(컴퓨터 그래픽) 등 후반 작업에 힘 쏟았다.”
이 영화를 만들며 국내 원전의 문제점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핵은 현생 인류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핵연료를 완전히 안전하게 저장하고 폐기하는 기술은 아직 없다. 게다가 만약 30년 넘게 가동된 부산 고리원전 1호기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인근 30㎞ 내에 위치한 부산·울산시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인구 수백만 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원전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상업영화로서 적정 수위를 지켜야 했다.”
재난에 대처하는 대통령(김명민)을 비롯한 정부 측 태도도 실감 나게 묘사했다.
“처음엔 재난을 수습하는 국가 원수, 현장에서 재난을 직접 마주하는 서민의 이야기를 비슷한 분량으로 다루려 했다. 한데 김명민씨가 ‘원전 노동자인 주인공 재혁(김남길)과 대통령의 비중이 비슷하면 이야기 초점이 흔들릴 수 있다’라고 조언했고, 고심 끝에 대통령 역할을 축소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맞는 선택인 듯하다. 그 대신 재난에 속수무책이던 대통령이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진심을 다해 사태 수습에 힘쓰는 대통령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주인공 재혁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그린 시선도 무척 와 닿는데.
“할리우드 재난영화에는 늘 죽음을 앞두고도 ‘쿨함’을 유지한 채 장렬하게 전사하는 영웅이 등장한다. 이 영화를 기획하며 (김)남길씨와 늘 이야기했다. ‘재혁을 절대 영웅으로 그리지 말자’고. 재난 앞에서 똑같이 좌절하고 두려워하는 한 사람으로 그려야, 오히려 관객도 재혁에게 감정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길씨도 그 점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쯤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텐데, 끝까지 자신을 억누르며 연기하는 모습에 무척 고마웠다.”
‘원전 재난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호평이 있는 반면, ‘전형적인, 가족 중심의 신파 드라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대규모 상업영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려는 감독들이 흔히 겪는 속앓이랄까. 상업영화이기에 갖는 한계는 분명 있다. 다만 나에게는 그동안 여러 영화를 만들며 세운 공식이 있다. ‘관객 열 명 중 세 명은 포기하자’는 전략이다. 열 명 중 세 명은 얼굴을 찌푸리더라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게 더욱 절실했다.”
-군중신을 무척 효율적으로 찍는다고 정평이 나 있다.
“‘떼샷(군중신)’은 우리 제작진의 전문 분야다(웃음). 군중이 등장하는 장면을 찍는 영화 현장이 있다면 ‘알바’ 뛰고 싶다.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다른 감독들이 군중신을 촬영하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도움됐다. 무엇보다 ‘연가시’를 찍으며 ‘어떻게 하면 부족한 제작비와 최소한의 인원으로 군중신을 효율적으로 만들까’ 궁리하는 동안 많은 노하우가 쌓였다. ‘판도라’는 ‘연가시’에 비해 제작비가 넉넉했던 터라 비교적 여유 있게 작업했다. 탁 트인 풀 숏에서는 수많은 보조 출연자들을 전경과 후경에 알맞게 배치해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했고, 중간중간 연기 잘하는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군중신에서 보조 출연자의 연기는 주연 배우 못지않게 중요하다. ‘연가시’ 촬영 때 내가 직접 연기를 가르쳤던 보조 출연자들이 대부분 다시 출연해, 실감 나는 장면을 만들어 줬다.”
‘판도라’는 한국영화 최초로 미국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와 글로벌 배급 계약을 맺은 작품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이뤄 낸 성과라 볼 수 있을까.
“전 세계가 직면한 보편적 화두인 원전 문제를 다룬 점에 주목한 듯하다. 넷플릭스는 최근 ‘옥자’(2017년 개봉 예정, 봉준호 감독) 등 다양한 한국영화와 활발히 비즈니스 관계를 맺어 왔다. 영화 제작자 입장에서 이 같은 온라인 플랫폼의 등장은 무척 반갑다. 한국 영화 시장 안에서는 작가들의 상상력을 실현시킬 제작비 마련에 한계가 있으니까. 후배 창작자들은 이런 해외 배급 통로를 잘 활용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판도라’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로 다가가길 바라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요즘처럼 혼란스런 시국에, 굳이 극장에서 어둡고 아픈 이야기를 봐야 하느냐’고. 하지만 난 ‘판도라’가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지켜보며 화나거나 걱정스러운 관객이 있다면, 현실을 변화시킬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30년 넘게 가동한 원전들은 지금부터 폐로 계획을 세워야 하고, 원전 중심의 국내 에너지 정책도 세계적 추세에 따라 신 재생 에너지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우리가 힘들게 만든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과 후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연가시’와 ‘판도라’를 통해, 재난과 그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회 시스템을 그린 박정우 감독. 그는 자신이 만든 재난영화를 “가상의 재난을 통해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그는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은 재난 상황 속의 문제점을 영화에 반영하고, 앞으로 미래에 우리가 슬기롭게 피해 가야 할 최악의 상황을 스크린에 미리 꺼내 보인다. 위기에 처한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한 국가 시스템, 그 속에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은 “이제껏 우리 사회가 경험한 재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라고. 박 감독에게 ‘좋은 재난영화’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도 재난이 닥칠 수 있고,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경종을 울리는 영화”라 답했다. “어차피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순 없지 않나. 영화를 통해 미리 재난 상황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좀 더 문제의식을 갖고, 재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 내 목표다. 이것이 재난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올바른 접근이자, 남의 불행을 단순 흥밋거리로 만들기 쉬운 소재가 지닌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이라 생각한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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