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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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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논설위원

고대훈논설위원

탄핵소추 사흘 전인 지난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똑같이 ‘탄핵소추’와 ‘뇌물 의혹’이라는 불명예를 겪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노무현의 생가와 묘역을 감싼 풍경은 흥미로웠다. 스산한 초겨울의 평일 오후인데도 부부·연인·친구, 손자와 할아버지 등 수십 명의 발길이 한적한 시골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국화 한 송이를 1000원에 파는 80대 마을 어르신은 “예전보다 두 배가 늘어 하루 100송이는 판다”고 했다(그래픽 참조).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한 나의 대통령’ 등 추모와 애도의 글이 새겨진 1만5000개의 박석(바닥돌), 새하얀 국화가 수북이 쌓인 헌화대, 지하의 노무현을 덮고 있는 고인돌 형태의 너럭바위, 너럭바위를 떠받치고 있는 녹슨 강판의 검붉은 색깔, 그리고 그 앞에서 묵념하는 시민들. 그 광경은 ‘죽은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을 그려낸다.

사람들은 왜 하필 여기를 찾을까. ‘추모의 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무현의 외침이 단초를 준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열심히 일하면 땀 흘린 만큼 잘사는 사회, 바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4평 남짓의 작고 어두운 영상실 안에서 앉아 그의 생전 육성을 듣노라면 바로 곁에서 오늘의 시국을 질타하는 듯 착각에 빠져든다.

노무현에게서 뭘 기대할까. 서울, 부산, 대전, 수원, 광주,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은 방명록에 짧은 글을 남겼다. “지금 많이 그립습니다” “대한민국이 너무 아픕니다” “도와주세요”…. 회사 작업복 차림으로 마산에서 왔다는 40대 직장인은 “욕도 많이 먹었지만 대통령으로서 철학과 지조가 있던 분이잖아요. 참배하고 나니 좀 위안이 돼요”라고 했다. ‘노사모’도, ‘노빠’도 아니었다. 박근혜에게서 상처받은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무현을 만나러 온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박근혜가 노무현을 위해 초혼(招魂)의 ‘굿판’을 마련해줬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박근혜는 또 한 명의 사자(死者)를 불러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근혜의 ‘아우라(aura)’는 박정희다. 박정희에 대한 후광효과(halo effect)가 대통령 박근혜를 만들었다. 박정희의 좋은 유전자가 딸에게 전이됐으리라는 예단이 우리를 집단 최면 상태로 몰아넣었다.

박정희 신화는 여전히 견고할까.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된 10월 이후 경북 구미시 상모동의 박정희 생가를 찾는 방문객은 지난해에 비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그래픽 참조). 생가는 박정희 신화의 발원지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은 불운했다.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임용은 되지 않자 고향인 경북 성주(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사드 배치 지역)에서 동학에 가담하는 바람에 옥살이를 했다. 이후 생활도 어렵고 감시도 심해지자 고향을 등지고 구미로 옮겨 산지기를 하며 터를 잡고 1917년 박정희를 낳았다. 그 터가 제왕지기(帝王地氣)를 품었다고 한다.

5·16 거사를 성공시키고 대통령에 오른 것, 20대에 부모를 총탄에 잃은 딸 박근혜가 불운을 딛고 대를 이은 ‘부녀 대통령’에 이른 것도 이 생가의 정기를 받은 은덕이라고 풍수가들은 풀이한다. 그런 명당에 불을 지른 최근의 방화 사건은 박정희 신화의 균열을 가져올 불길한 전조일 수 있다.

박근혜는 “사심 없이 소신과 비전을 가지고 나랏일에 임하셨던 아버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 박정희는 외면당하고,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지칭한 노무현이 부상하는 상황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박근혜의 후광정치 모델은 초라한 말로를 향해 가고 있다. 그 틈에 노무현의 후광을 선점하려는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실체도 없는 후광에 현혹되지 말라는 역사의 경고일 수 있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