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4. 기시감 (2)

중앙일보

입력

접속을 끊자마자 대화창이 열렸다. 예라 엄마가 대화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라 엄마는 계속 울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줄줄이 문장을 쳐 올리다가 잠시, 침묵하는 행간에서 세영은 예라 엄마의 깊은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예라는 예라 엄마가 갖고 있는 사진 속에서 금방 빠져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예라의 이미지가 여러 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3D 입체 영상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현해 내는 방식은 평면의 모니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세영은 남편이 사용했던 서재의 책상에 앉아 모니터로 들여다보며 자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미지의 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남편과 함께 예라와 예라 엄마를 만났던 세영에게도 ‘똑, 같, 다.’라는 느낌과 생각이 만들어졌다. 예라 엄마도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업데이트되어 다시 깨어난 예라를 보며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만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진짜 예라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 애의 모습을 보고, 그 애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애의 볼과 팔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세영은 영화가 끝난 뒤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팔을 잡아 다시 앉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예라 엄마의 말처럼, 실제로 세영의 팔뚝에서도 남편의 생생한 손길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이후로도 세영은 집까지 걸어오며 다른 회원들을 만날 때마다 보인 남편의 표정과 말투가 생전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당황했다. 모니터 속의 남편은 단지 정밀하게 프로그래밍 된 그의 아바타일 뿐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변명을 했고, 그런 자신이 당황스러워 서둘러 접속을 끊으면서도 구실을 댔다.
세영은 채팅창에 <나도 그랬어요.>라고 쳤다가 지웠다. 갑자기 예라 엄마가 접속을 끊고 창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실수로 클릭을 잘못 한 게 아니라 일부러 재빨리 빠져나간 것 같았다. 모니터 하단의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예라 엄마는 남편이 돌아오는 소리를 뒤늦게 알아챘을 것이다. 급하게 전원 버튼을 눌러 강제 종료시키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눈물을 닦고 남편을 맞았을 것이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죽은 예라에게만 붙들려 사는 그녀가 개발비까지 대면서 아이의 아바타를 프로그램 안에 심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예라 아빠가 취할 조치는 뻔했다. 예라 엄마를 다시 정신 병원으로 보내거나 카멜을 상대로 소송을 걸거나. 어느 쪽이든 예라 아빠는 그동안 예라 엄마로부터 흘러나온 돈을 추적하여 회수하려 들 것이다. 절반의 비용을 댄 세영도 그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카멜이 처음 서버를 구축하자고 제안했을 때에는 세영도 거절하려고 했었다. 카멜의 메일을 확인하고 분위기를 보기 위해 바로 들어가 본 카페에서 예라 엄마와 채팅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결심했다. 그녀도 시험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고, 앞으로 들어갈 개발비 중 일부를 대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예라 엄마는 3D 영상으로 만들어지고 서버까지 구축되면 더욱 생생해질 거라면서 잔뜩 들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서로 다 알게 될 일이라면서 현재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이름까지 댔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게시판의 글이나 채팅을 통해 세영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영은 카멜의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밀리에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하여 깊이 빠져들게 하고, 아이템을 삽입해 주어 자진해서 기부하게 하고, 점점 더 다른 비용들을 대게 하는 일련의 방식이 다른 이의 슬픔을 이용하는 것 같아 비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면 카멜은 먼저 자신을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카멜의 아내는 비행기 사고로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져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카멜은 프로그램과 아바타에 집착하며 판을 키우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자신이 만든 세상에 자신이 먼저 깊이 중독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영은 카멜에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버그가 난 채로 방치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그대로 모두 삭제했다.

하지만 종합 스토어의 쇼룸에서 새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남편의 마지막 영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자꾸만 다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옆에 와 함께 걷고, 밥을 먹을 때에도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잠을 잘 때에도 곁에 와 누워 팔베개를 해주며 속삭였다. 갑자기 혼자가 됐지만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정신을 놓곤 했던 그때처럼, 화면 속에서나마 살아 움직이는 남편의 아바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자주 멍해졌다. 남편의 죽음을 마치 처음인 듯 다시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그 슬픔마저 너무 생생하여 날마다 자다 깨어 어둠 속에서 혼자 울었다.
세영은 결국 열흘 만에 돈을 대기로 결심하고 카멜에게 메일을 쓰면서, 괜찮은 사업에 투자하는 것일 뿐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괜찮은 사업이라고, 괜찮은 아이템에 돈을 대고 돈을 댄 만큼의 지분을 달라고 하면 된다고,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말들을 적어 내려가면서,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여 결정한 듯한 착각에 빠져 흡족해졌다.
냉정히 따져보면 사실 그리 나쁜 투자도 아니었다. 날마다 사람들은 죽고 날마다 유족인 회원들이 늘었다. 죽은 아이 때문에 정신병원에 드나들며 좀처럼 그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는 예라 엄마와 같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신처럼 꽤나 이성적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마저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을 보면 분명 잘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제2의 싸이월드나 스타크래프트,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될 수도 있었다. 절반의 비용을 대고 절반의 지분을 받기로 했다.

사무실이 꾸려지고 일주일 만에 서버가 구축됐다. 카멜은 이제 와서 생각해 냈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수순임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세영은 이제 상관없었다. 남편과 함께 찍은, 혹은 남편 혼자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남편의 식성과 습관들을 카멜에게 보냈다. 카멜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개개인에 맞는 아바타를 생산했다. 입소문이 나며 회원들이 몰려 사무실 인원을 보충했는데도 한 달 이상 걸렸다. 드디어 사용해도 좋다는 메시지와 함께 서버 주소를 첨부 파일 형태로 받고 세영은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시켰다. 바로 집으로 들어와 서버에 접속하여 회원가입을 하고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설치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입장하니 거짓말처럼 남편이 다시 깨어났다. 모니터 속의 세영은 더욱 정교해진 모습으로 깨어난 남편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모니터 밖의 세영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자판이 잘 쳐지지 않아 자꾸만 오타를 냈다.
예라 엄마는 남편이 잠들면 몰래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세영은 예라 엄마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넋두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대화창을 닫고 바탕 화면에 깔아놓은 서버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클릭했다. 메인화면에서 <부재중>모드로 바꾸고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들어가 봤다.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고, 어두운 방에서 남편이 혼자 잠들어 있었다. 마우스로 클릭하여 화면 속의 침실을 확대하고 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확대하여 전체 화면으로 띄웠다.
모로 누워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워 넣고 자는 버릇까지 남편은 생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얕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어깨마저 가만히 들썩거렸다. 화면 속의 남편이 무릎 사이에서 손을 빼내 기지개를 켜고 다시 내리고 뒤척이다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이내 고른 숨소리,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까지, 게임 속에 심긴 그의 아바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그의 방에 몰래 설치한 화질 좋은 CCTV 화면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영은 손을 뻗어 따뜻한 모니터 속의 남편을 어루만져 봤다. 바로 거기에 그가 있었다.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서져 의식마저 잃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며칠 동안 견디다 끝내 숨을 놓은 남편이, 화장장의 불길 속에서 두 시간 만에 재가 되어 나온 남편이 바로 그 안에서는 여전히 숨을 쉬며 살고 있었다.
세영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서재에 있는 책장의 먼지를 털고 옷장 속의 구겨진 옷들도 잘 펴서 다시 걸었다. 잠옷과 트레이닝복과 외출복 한 벌로 버티고 있는 남편이 생각나서 베이지색 면바지와 보랏빛 폴로셔츠를 찾아서 걸어놓고, 디테일이 잘 보이도록 스마트폰으로 찍어 바로 카멜에게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누군가의 메시지 알림을 울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의 아바타는 직원들에게 맡기지 않고 카멜이 전담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쿠션 커버를 바꾸고 침대커버를 바꿀 때 카멜로부터 접수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 그도 아직 작업 중이거나 서버에 접속해 있거나, 어느 쪽이든 깨어있는 듯했다. 세영은 내일이나 모레쯤 그 옷을 입고 자신을 맞을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자 흐뭇해졌다.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스팀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속옷까지 모두 벗고 욕실로 들어가 전용 세제를 풀어 샤워부스와 변기까지 닦고 샤워 볼에 거품을 내 몸을 씻었다. 가볍고 편안한 실내복을 걸쳐 입고 간단하게 음식을 준비했다. 책상 앞에 미니 테이블을 펼치고 2인분의 식탁을 차렸다. 두 개의 양초에 불을 붙이고 붉은 와인과 둥근 잔을 준비하여 각각의 자리에 놓고 앉아 잔을 채웠다.
그리고 모니터 속의 잠든 남편을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웰컴 투 더 홈.”

알코올 기운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번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부재중 모드 그대로 남편의 아바타를 깨웠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 일어난 남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런 그가 우스워 세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선물을 보냈어. 마음에 들면 좋겠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들이켜고 남편의 방에 불을 켜줬다. 모니터 속에서는 남편이 일어나 스위치에 손을 대고 켜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 바뀐 기능들을 이것저것 시험 삼아 클릭해 봤다. 세영의 입가에서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집안을 서성이다가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던 남편이 갑자기 주섬주섬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세영은 당황하여 얼른 모니터 하단의 상태를 확인했다. 산책 모드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남편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비틀어 열고 닫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거리로 나갔다. 저쪽 세상은 어느새 부옇게 밝아있었다.
세영도 술잔을 든 채로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이쪽 세상도 부옇게 날이 밝고 있었다. 책상 앞으로 돌아와 스토어 너머의 강 쪽으로 가고 있는 남편의 방향을 뒷산으로 전환했다. 그쪽에는 뭐가 있는지 새로 생긴 서버의 배경들이 궁금했다. 책상 의자를 치우고 1인용 소파를 컴퓨터 앞으로 끌고 왔다. 남편이 생전에 글을 쓰다가 잠시 쉬며 책을 읽기도 하고 깜빡 잠이 들기도 하던 소파였다.
모니터 속 남편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세영은 소파에 눕다시피 깊숙이 몸을 묻고 바닥이 거의 드러난 술을 병째 들이켜며 책상 위의 모니터를 올려다봤다.
산세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희끗하게 잔설이 박힌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기도 했다. 세영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것 봐, 혼자 돌아다니니까 위험하잖아.”

취기가 오르며 졸음이 몰려왔다. 올라가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남편을 향해 중얼거렸다.

“힘들어? 이제 그만 돌아올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영은 책상까지 손을 뻗을 힘이 없었다. 모드를 <집으로>로 전환시키고 로그오프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남편의 체취가 배어있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오염도가 높아서 사냥꾼조차 머물지 않는 옛 도시의 외곽 지대를 지나고 완전한 폐허의 유령 도시가 된 빌딩 숲을 지났다. 루는 나룻배를 숨겨 둔 벙커에서 밤을 보내고 태양이 뜨자마자 강에 배를 띄우고 건너, 반대편 벙커에 다시 배를 숨겼다. 무너진 건물 더미들 사이로 한나절을 더 걸어서야 완충지대에 도착했다.
완충지대의 화장장에 맡겨놓은 자전거를 찾아 도시로 들어가는 남쪽 샛강의 다리를 건넜다. 도시는 거대한 강 위에 떠 있는 섬 안에 있었다. 강의 본류와 만나는 북쪽 언덕으로부터 남으로 점차 낮아지는 섬의 둘레는 샛강 쪽을 제외하고 빙 둘러 높고 가파른 절벽이었다. 북쪽 절벽의 경사가 가장 심하고 험했다. 강폭이 넓은데도 물살이 세서 어디로든 배를 댈 수 없었다. 샛강 쪽이 아니면 도시로는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샛강의 수심이 가장 깊은 곳에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샛강의 물고기를 관리하는 화장장 사람들의 배였다. 화장장에서 나온 뼛가루를 사료로 하여 키운 물고기는 도시 내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 공급원 중 하나였다. 물고기들이 강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물속으로 넓게 그물을 쳐놓은 빨래터에도 몇몇의 여자들이 커다란 카펫을 치대며 빨거나 너른 바위 위에 널어놓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 곁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경작지를 지나 도시로 들어서자마자 루는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수집한 물건들이 잔뜩 든 배낭을 메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큰 비라도 내렸는지 거리가 온통 누런 뻘밭이었다. 골목마다 밀려든 토사가 언덕을 이루고 물기를 흠뻑 먹은 콘크리트 더미가 무너져 곳곳의 녹슨 철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현관이 막힌 집들은 이층 창문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늘어뜨리고 이층이 무너진 집들은 일층으로 짐을 옮겼다. 젖은 옷가지며 가재도구들을 꺼내 말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곰팡내 가득한 집안을 환기시켰다. 새로 생긴 폐허 더미를 만날 때마다, 루는 질러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자전거가 짐처럼 느껴졌다.
철근을 넉넉하게 대서 보강한 푸코의 가게는 이번 비에도 역시나 끄떡없었다. 가게에는 어쩐 일인지 푸코 대신 태수가 나와 앉아 있었다.

“너는 또 왜 여기 있냐?”

“루!”

태수가 얼른 달려 나와 루의 자전거를 받았다.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기둥에 묶인 제 자전거와 나란히 세워두고 묶었다.

“아버지 아시면 어쩌려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너야 상관없겠지. 혼나는 건 우리니까.”

“와아, 불룩하네.”

태수가 루의 배낭을 벗겨 들고 부리나케 계산대 뒤로 돌아들어 갔다. 그가 배낭을 들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는 동안 루는 허리 높이의 계산대에 팔꿈치를 올리고 기대서서 바깥을 살폈다.

“헉, 자동차라도 발견한 거야?”

“트럭.”

“굉장한데! 다 가져온 거 아니지?”

“잘 묻어뒀지.”

“언제 다시 나갈 거야? 나도 데려가.”

“미쳤어?”

“아버진 B지구에 가셨어. 오래 걸리실 거야.”

“안 돼.”

“이번 한 번만, 응?”

“꿈도 꾸지 마.”

태수는 물건들을 분류하며 루에게 어디서 어떻게 구한 것들인지 말해달라고 졸랐다. 새로 발견한 마을이나 농가는 없었는지, 멀리서나마 사냥꾼들을 만나지는 않았는지, 이번 여행지의 지형과 그곳에서 지내는 낮과 밤에 대해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특히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냥꾼들에 대해서는 전에도 물었던 말들을 또 물어대며 루를 귀찮게 했다.

“피곤하다. 그만 좀 해라.”

그래도 태수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태수는 도시 밖으로는커녕 요새 같은 자신의 집에서도 자주 나올 수 없었다. 아버지인 현 회장의 거대한 서재 옆에 딸린 별실에서 독선생을 모시고 매일 공부에 공부, 공부만 했다. 그렇게 공부만 해서 뭐에 써먹자는 것인지 루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태수 본인의 뜻은 아니었다.
태수가 분류한 물건들을 각각의 상자에 따로 담아놓고 홀쭉해진 배낭을 루에게 건넸다.

“푸코는 어디 갔는데 안 와?”

“푸코가 뭐냐? 형이 너보다 열 살이나 많거든!”

“늙은 게 자랑이야?”

“정말 신기해. 푸코 형 같은 사람이 어떻게 너한테는 그냥 좋아, 다 좋아야. 진짜로 좋아하나?”

“지랄을 해라.”

“지랄은 네가 만날 형한테 하는 게 지랄이고.”

“그니까 어디 갔냐고, 그놈의 푸코 형!”

“너한테는 형이 아니고 오빠.”

“미친. 그래서 어디 갔냐고, 대체.”

“사실은……”

“사실은 뭐?”

루의 눈치를 살피는 태수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빨리 말해라.”

“시몬이 아파.”

“뭐?”

“그게……”

“야!”

“어디서 좀 맞고 왔어.”

“맞아? 어디서?”

“맞기만 한 게 아니라.”

태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는 가게에서 튀어나갔다. 그리고 곧장 집을 향해 달렸다. 후다닥 쫓아 나온 태수가 뒤에서 뭐라 소리쳤지만 루에게는 벌써 들리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밀려온 토사와 콘크리트 잔해로 범벅이 되어 가로막혀 있었다. 콘크리트 더미 쪽으로만 재빨리 디디며 뛰어올라 넘다가 튀어나온 철근 조각에 종아리를 긁혔다. 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집을 향해 뛰었다. 도시에 비가 내리면 사람들이 미쳤다. 거리로 뛰쳐나와 갈증을 해소하고 빨래를 하고 몸을 씻으며 흥분했다. 흥분한 그대로 아무 곳에서 들어가 약탈하고 아무나 붙들고 강간했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맞아 죽거나 수비대에 넘겨져 즉결 처분됐다. 발각되지 않으면 그대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비가 멎으면 자행하던 쪽도 당하던 쪽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죽은 사람들은 화장장으로 옮겨져 한 구덩이에서 소각되고, 다친 사람들은 다친 채로 거리 한쪽에 방치됐다.
제 이름을 부르며 뛰어 들어오는 루를 보고도 시몬은 일어나 앉지 못했다. 시몬의 얼굴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다. 머리에는 붕대를 친친 동여매고 시커멓게 피멍이 맺힌 두 눈 아래 부풀어 오른 광대뼈와 입가에도 잔뜩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우는지 웃는지도 모를 표정으로 시몬이 한쪽 손만 뻗어 루를 반겼다.

“뭐야, 무슨 일이야?”

루의 목소리를 듣고 주방 쪽에서 푸코가 튀어나왔다.

“대체 어떤 새끼냐고!”

“진정, 진정.”

“지하철역 그 새끼들이지?”

주걱을 든 채로 푸코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뛰쳐나가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루의 다음 행동을 벌써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내가 이미 처리했어.”

“벌써? 거짓말!”

“아니, 진짜. 지금쯤 모조리 활활 타서 샛강에 뿌려졌을 거야.”

“뭐야, 한 놈이 아니었어?”

“응? 응, 그게, 아이쿠 타겠다.”

푸코가 이야기를 피하듯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몬이 누워있는 매트리스 옆으로 다가가던 루의 발에 플라스틱 대야가 채였다.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이미 늦어 안에 담긴 핏물 밴 걸레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루는 콘크리트 바닥이 젖든 말든 내버려 두고 시몬이 누운 매트리스 옆 카펫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시몬이 머리맡에 놓인 성경을 가리켰다. 루가 집어 시몬에게 건네자 누운 채로 가슴 위로 올리고 루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얹게 했다. 루는 시몬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고도 기도가 나오느냐는 말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나마 그래서 목숨이라도 건진 거야. 그 기도 덕분에.”

푸코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 그릇을 받친 쟁반이 들려 있었다.
루는 시몬에게 잡힌 손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거칠게 눈만 흘겨 보였다. 쟁반을 든 채로 푸코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웃었다.
푸코는 시몬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죽 그릇을 루 앞으로 밀어주고, 한 그릇은 제 앞에 놓고 떠먹으며 시몬의 입에도 한 입씩 떠 넣어주었다.
따뜻한 죽 냄새를 맡자 루도 갑자기 배가 몹시 고파졌다. 말린 옥수수에 짭짤한 통조림 햄까지 넉넉하게 썰어 넣고 끓인 죽이었다.

“시몬 주라고 태수가 가져왔어.”

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그릇째 들고 들이켰다. 오염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태수네는 풍요롭던 시절에 백화점이었다는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쪽 도시뿐 아니라 어느 구역이든 파괴되지 않은 백화점 건물은 모두 태수네처럼 무기를 가진 군인 출신의 부자나, 그들의 비호를 받는 정부 인사들의 소유였다. 섹션을 나눠 세를 놓기도 하고 통째로 사용하기도 했다. 창문도 하나 없고 정문을 제외하고는 출입문도 없는 폐쇄적인 구조가 도시의 무법자들로부터 신변의 안전과 재산을 지켜줬다. 그러고도 따로 경비 서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밤낮으로 건물 주변을 순찰하는 곳도 있었고, 태수네처럼 소속된 군인들이 아예 초소를 쌓아놓고 지키는 집도 있었다. 시민자치회를 결성하고 오랫동안 그쪽 일을 맡아했던 터라 아직도 성을 따 현 회장이라 불리는 태수 아버지도 대재앙 당시에는 군의 고위 장성이었다. 부대의 무기를 점거하여 폐허가 된 도시의 쓸 만한 물건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그걸 바탕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정착시키며 도시의 정리와 재건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얼마나 가차 없이 처리했는지 지켜봤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여전히 대량의 진짜 무기들이 있었다.

“아직도 이런 게 남아 있다니, 믿어지냐?”

푸코가 투덜거렸다. 접시의 바닥까지 핥다가 루는 문득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끌어 모아 놓은 거냐고.”

시몬이 다치고 태수가 가져온 통조림으로 푸코가 죽을 끓이고, 그때도 여행에서 돌아온 자신은 혓바닥으로 죽 접시를 바닥까지 핥았다.

“그 집 지하 창고를 언젠간 꼭 열어보고야 말겠어.”

물론 3년 전 할아버지가 루와 시몬을 푸코에게 맡기고 광야의 동굴로 떠난 뒤 셋이서만 살게 된 이후로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소한 일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전부터도 종종 있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지며 깊어지고 있었다. 푸코는 미쳐가는 사람들의 증상 중 하나라고 놀려대곤 했지만 지속시간마저 길어지고 있었다.

“하긴, 요즘은 태수도 특별한 날 아니면 못 먹는다고 하긴 하더만.”
이 말 역시 언젠가 푸코가 했던 말이었다.

“창고의 물건들이 슬슬 떨어져가고 있는지도 몰라. 며칠 전엔 태수네 집사가 말린 고기를 좀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고.”

루는 이 기묘한 느낌을 떨쳐버리려는 듯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어차피 푸코에게 말해봐야 잔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아 참, 이번엔 좀 다른 길로 왔는데, 트럭이 하나 있더라, 그것도 아주 멀쩡한 게.”

“트럭?”

“응, 상태도 아주 좋았어. 작은 부품들만 대충 분해해서 들고 왔는데, 나머지는 다시 가서 가져와야 해.”

“우와, 수확이 아주 좋은데?”

“응, 하지만 시몬이 이러고 있으니 당분간은 못 움직이겠네.”

“그것도 그렇고, 그냥 몇 놈만 보낸 게 아니라 놈들 아지트를 아주 작살 내놨거든. 조만간 이쪽으로 쳐들어올지도 몰라.”
푸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가 시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게 이 자식아, 아무리 전도도 좋지만 그쪽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앉은 채로 매트리스 옆구리를 냅다 발로 차자 시몬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푸코가 기겁을 하며 루를 시몬에게서 멀찍이 떼어놨다.

“엉덩이랑 허리 쪽도 좀 다쳤어.”

“뭐야, 맞기만 한 게 아냐?”

푸코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는 벌떡 일어섰다가 꾹 참고 다시 앉았다. 푸코가 이미 처리했다고 말릴 정도면 그쪽은 거의 죽어나갔다고 봐야 했다. 전쟁이 난다고 해도 어차피 늙어빠진 부랑자들뿐인 그쪽 패거리와는 싸움이 안 됐다. 그래도 당분간은 집과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푸코는 때마침 루가 돌아와 다행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시몬을 루에게 맡겨두고 서둘러 가게로 나갔다. 루는 태수가 정리해서 넘겨준 배낭의 남은 물건들을 함석 상자에 넣고 무기들도 벽에 잘 걸어두었다. 양동이에 담긴 물을 대야에 퍼서 얼굴과 손만 대충 씻고 카펫 위에 허리를 쭉 펴고 누웠다. 배도 든든하니 집으로 돌아왔다는 나른함이 그제야 밀려들었다.
설핏 잠이 들려는데 시몬이 더듬더듬 손을 뻗쳐오는 게 느껴졌다. 루는 얼른 윗몸을 일으켜 시몬을 들여다봤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여전히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시몬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단지 루가 거기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듯. 루는 시몬의 손을 다시 담요 속으로 넣어주고 어깨까지 꼭꼭 여며 덮어주고, 도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