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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친박, 배신을 두려워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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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오늘 새누리당은 친박과 비박이 원내대표 경선전을 치른다. 의원 수가 128명이니 그 반인 64명만 제 편으로 끌어들이면 원대대표를 차지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표결 때 찬성한 것으로 확인된 새누리당 의원이 62명, 엊그제 친박 파벌모임인 ‘혁신과 통합’에 이름을 올린 의원이 62명이다. 동수다. 두 그룹이 각각 비박(나경원 후보)과 친박(정우택)을 지지한다면 나머지 4명이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 아슬아슬한 승부다.

가치 지키기 위해 변하는 게 보수
새누리, 새 리더로 야당 준비하길

의외로 싱거울 수도 있다. 현재 기류는 비박에 자신감이 붙고 친박의 구심력이 무너지는 추세다. 상승과 하강이 뚜렷하다. 심리적인 분수령은 배신에 대한 태도였다. 탄핵에 찬성한 62명은 1주일 전만 해도 박 대통령 덕분에 금배지를 달았으면서 어려울 때 배반할 수 있느냐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결단할 때가 되면 결단하는 게 어른의 일이다. 그들은 기표소에 들어가 박근혜와 인간적 의리를 끊는 의식(儀式)을 치렀다. 당과 보수와 민주주의라는 공공적 가치를 선택했다. 사적 의리에서 공적 대의로 이동했다.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극심한 고통이 그들을 단련시켰다. 철벽 같던 친박 앞에서 짐 싸들고 도망하지 않았다. 비박의 배신은 무죄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긴 그룹이다.

이름만 그럴싸한 ‘혁신과 통합’에 가담한 친박 의원도 62명이다. 그들은 배신론을 이겨내지 못했다. 박근혜에게 한번 준 마음을 배신할 수 없다고 했다. 배신과 의리론은 친박 의원들과 250만 명이라는 새누리 당원들의 마음에 팽배해 있는 정서다. 배신론은 오랜 파벌의 역사에 뿌리내렸다. 인간의 원초적 감성을 건드린다.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다. 여야, 좌우를 떠나 배신을 공격하고 의리를 내세우는 정치는 벗어나기 어려운 유혹이다.

문제는 친박 정치에서 배신론이 법과 제도, 공공성과 민주적 질서를 파괴할 정도로 압도했다는 것이다. 특히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응징해 달라”(2015년 6월 국무회의)고 이상한 말을 한 뒤 보수세력 안에서 ‘정서적 의리론’과 ‘공공적 가치론’이 분열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배신론이 집권세력의 세 기둥인 당·정·청에 통치이데올로기처럼 확산됐다. 배신자 응징을 선언할 무렵 박 대통령은 7대 재벌 총수를 연쇄적으로 불러 최순실 재단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의리론을 실천한 것이다.

정서적 의리론을 집권당 차원에서 실어나른 이들은 서청원·최경환에 이정현이 가세한 친박 주류다. 배신해야 할 때 배신하지 못하는 혼몽한 혹은 허약한 정신이 청와대와 정부의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쓰나미처럼 새누리당을 덮쳤다. 박근혜는 탄핵 심판대에 올랐지만 친박과 상당수 보수세력은 그가 뿌린 배신·의리론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새누리당은 해체돼도 좋다. 그렇다고 보수정당이 사라질 수 없다. 보수는 공공성과 책임감, 성장과 안정, 인간의 염치와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보편적 가치다.

보수는 흠 없는 완전체가 아니다. 고장이 나면 손질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성질과 유사하다. 새누리당과 당원들은 보수를 분열시키고 보수가치를 무너뜨린 박근혜를 버려야 한다. 지키기 위해 변화하는 건 보수의 장점이다. 보수가 새 리더십을 세워 스스로 수선하고 새 집을 지어야 할 때다.

친박 정치인들이 인간 박근혜까지 배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치만은 적극적으로 배신해야 한다. 폐허 위에 피는 꽃이 아름답다. 정치의 기세와 흐름을 살피건대 야당 쪽으로 정권이 넘어간다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집권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니 기회 살피길 게을리해선 안 된다. 상대편 실수에 따라 승패가 바뀔 수 있다. 유대인의 현자 솔로몬 왕은 이런 말을 했다. “번영의 날에 기뻐하고 역경의 시절엔 생각하라. 신은 나를 만들고 동시에 남을 만드셨다. 누구도 앞날을 알지 못한다.” 새누리당과 보수세력은 역경의 시절에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정권을 잡든 넘기든 박근혜를 깨끗이 잊어라. 보수에 새살이 돋아야 한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