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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붕괴 #4. 붕괴 (2)

중앙일보

입력

그가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우의 주머니에서 다른 명찰을 하나 꺼냈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두길 잘했군요. 제 옆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세요.”

엉겁결에 명찰을 받아든 나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민간구조대는 아닌 것 같은데요.”

“탐험대쯤이라고 해두죠. 자세한 건 7번 병동 로비에 도착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힘깨나 쓸 것 같은디 이리 와서 이거나 좀 드쇼.”

사투리가 섞인 걸걸한 목소리가 영문을 몰라 하던 나를 잡아끌었다. 엉뚱하게도 “NAVY SEAL"이라는 미 해군 특수부대 이름이 박혀있는 푸른색 모자를 쓴 노인은 낚시 가방같이 길쭉한 가방을 건네주었다. 무심코 받아든 가방은 쇳덩이라도 들어있는지 한없이 무거웠다. 이무생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단 노인은 잔뜩 찡그린 내 표정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옆에 있는 짧은 머리의 청년에게 말했다.

“내가 저 나이 땐 쌀 석 섬을 지고도 뜀박질을 했는데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죄다 약골들이니 이거야 원...”

“아버지야 평생 공업사 일을 하셨으니까 그렇죠. 제발 아버지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이무생은 아들의 타박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입만 쩝쩝거렸다. 엉성하고 이상한 구조대 행렬은 비에 젖은 골목길을 돌아나갔다. 약간 넓어진 골목길에는 상가와 가정집을 겸한 이삼 층짜리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망한 게 분명해 보이는 닭갈비 집 앞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던 전경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는 황급히 담배를 껐다.

“통제구역입니다. 더 이상 들어가시면 안돼요.”

제일 고참처럼 보이는 전경이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우리들을 제지했다. 제일 선두에 있던 차재경이 싹싹한 말투로 대답했다.

“비 오는데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우린 한국인명구조협회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추가 붕괴 위험 때문에 아직까지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정문에 가셔서 별도로 출입허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거 말인가요?”
차재경은 비옷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걸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정문 쪽이야 우리 말고도 전문가들이 많이 있을 테니까 후문 쪽으로 진입해서 구조작업을 진행해달라고 해서 이쪽으로 온겁니다. 건물 붕괴 사고는 주변에도 여파를 미쳐서 건물 바깥에 있다고 해도 중상을 입는 경우가 많거든요.”

차재경의 그럴듯한 설명에 제지하던 전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검은 조끼에 무전기를 가득 꽂고 있던 다른 전경을 손짓으로 불렀다.

“아직도 호출 안 되지?”

“롱 안테나 세웠는데도 안 됩니다. 비도 그렇고 전파가 워낙 많아서 튕겨 나가는 것 같습니다.”
축 늘어진 무전기들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내려 본 전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기, 비가 오면 부상을 입고 쓰러진 사람들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쇼크가 옵니다. 아까 정문에서 들었는데 붕괴 당시에 저쪽 건물에서 있던 사람들 중에 나온 사람들이 없다고 하던데요. 혹시 이쪽으로 나온 사람들 있습니까?”

진정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염려스럽다는 듯 차재경의 말에 전경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입장은 알겠는데 이러다 구조가 늦어져서 사상자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우리도 다들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입을 불허할거면 책임자 이름을 알려줘요. 나중에 문제 생기면 누구 탓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약간은 격앙된 차재경의 말에 상대방은 코끝을 찡그렸다.

“그럼 일단 신분증 맡겨놓으시고 들어가세요.”

“제 걸 대표로 맡기겠습니다. 그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품속의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건네준 차재경이 앞장서자 초조함을 애써 감추며 지켜보던 다른 일행들도 차례로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야트막한 언덕길과 사람들에게 가려져있던 붕괴된 병원을 가까이서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전에 아내와 함께 왔을 때 보았던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의 원인이었던 20층짜리 본관 건물은 맨 아래층 몇 개만 남겨놓고는 회색빛 부스러기로 변해있었다. 무너진 건물이 뱉어낸 회색빛 안개는 비가 오고 소방차가 물을 뿌려대는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붕괴된 현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개미처럼 보이는 구조대원들이 붕괴된 현장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원된 중장비들이 조심스럽게 붕괴된 조각들을 걷어내는 뒤로 야간에 쓸 조명등을 설치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정상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붕괴의 아수라장 위에서는 오직 살고자 하는 절규와 욕망만이 남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한편에는 시신들로 보이는 것들이 검은 비닐을 뒤집어쓴 채 줄지어 눕혀져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죽은 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인지 연신 비닐 위를 날아다녔지만 돌로 눌려진 비닐은 피에 젖거나 뭉개진 머리끝이나 회색으로 변해가는 팔다리만 보여주었다. 펄럭이는 비닐 아래 내 아들과 아내의 차가운 시신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억센 팔이 조용히 팔뚝을 낚아챘다. 차재경이었다. 나는 어둠보다 더 어둡고, 얼음보다 더 차가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향해 조용히 내뱉었다.

“놔 주세요. 제 아내랑 아이가 저기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 가족들은 저기 없습니다. 그러니 안 가도 됩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난 이 병원 이사장입니다. 당신 부인 윤영심씨와 아들 나휘군은 본관 건물에 있지 않았어요.”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무너진 병원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온갖 잡동사니 같은 사람들을 이끌고 자기 병원으로 숨어들어왔다고? 의문이 가득 담긴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차재경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당신 가족들은 저쪽 7번 병동에 입원해있었습니다.”

하얀 목장갑을 낀 차재경의 손이 가리킨 곳은 무너진 본관 뒤편에 있는 삼 층짜리 건물이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하얗게 지어진 높은 본관 건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낡은 건물이었다. 그 작은 건물 역시 본관 건물이 무너지면서 토해낸 회색빛 토사물 같은 잔해를 잔뜩 뒤집어쓴 채 이제 막 내려앉은 어둠 한복판에 오롯이 서 있었다.

“저 건물에 제 가족들이 있었다고요? 지난주에 왔을 때는 본관 13층에 있었는데...”

“1371호는 당신이 오면 보여주기 위한 가짜 병실이었습니다. 나휘군은 저곳에서 치료를 받다가 당신이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 병실로 옮겼던 겁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당신 부인이 그걸 원했으니까요. 나머진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뜻 모를 말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차재경은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는 다른 일행 쪽으로 옮겨갔다. 아까 기도를 올리자고 떠들던 젊은 여인과 중년의 여인이 서로 날카롭게 말을 주고받았다. 정확하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종교와 관련된 다툼인 게 뻔했다. 탐험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일행들은 화산재같이 내려앉은 회색 먼지들을 가득 뒤집어쓴 채 말다툼을 벌이거나 혹은 묵묵히 낡은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내게 두 번째로 말을 건넨 사람은 젊은 여인의 남편이었다. 김원섭이라는 이름의 명찰을 어색하게 들이민 사내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차재경이 간신히 떼어낸 아내를 턱으로 가리켰다.

“원래 저 정도는 아니었답니다. 불임이라서 인공수정에다가 체외수정을 거듭해서 낳은 아이가 심장에 이상이 있다고 하니까 하루아침에 돌변하더군요.”

김원섭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지만 파리한 조명에 비친 붕괴 현장은 더 음울하고 불길해 보일 따름이었다. 나는 김원섭에게 위로의 눈길을 건넸다. 가족 중 한 명이 아프다는 것은 단순히 환자가 한 명 생겼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환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식이라면 건강하지 못한 유전자를 물려주었다는 암묵적인 죄책감 때문에 숨쉬기조차 고통스러웠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김원섭은 무너진 시멘트 더미를 넘어가기 위해 잠깐 멈춘 행렬에서 눈을 돌려 무너진 병원 건물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데요.”

마치 나의 의문을 이끌어내는 듯한 말투였다. 대답 대신 “뭐가요?”라는 뜻이 담긴 눈빛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저기 아래 보이시죠. 건물이 붕괴되는 가장 큰 원인은 건축물의 하중이 기둥이나 벽면으로 지탱할 수 있는 한계중량을 초과하기 때문이죠. 저 건물은 원래 12층짜리 건물 위에 새로 8개 층을 올린 겁니다. 물론 설계 전에 한계중량을 면밀히 검사했고, 안전성 체크도 엄격하게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아! 저 건물 증축 설계를 제가 맡았거든요. 저거랑 뒤편 7번 병동을 이어주는 브리지까지 한꺼번에요.”

조각난 시멘트 사이로 구부러진 철근들이 못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철근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나는 약간은 자랑스러워하는 김원섭에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무너질 이유가 없는 건물이 무너졌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고 저걸 보세요. 저기 아래층 세 개는 멀쩡하잖아요.”

“당최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요.”

김원섭은 답답하다는 듯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하중 문제 때문에 붕괴되었다면 제일 아래층이 가장 크게 파손되었어야 했습니다. 위층에서 붕괴된 무게까지 더 한다면 말이죠. 근데 아래층 세 개는 멀쩡하잖아요. 저건 건물이 하중 때문에 붕괴된 게 아니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럼 뭐 때문에 멀쩡한 건물이 하루아침에 주저앉았다는 말입니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주변을 한번 쓱 돌아본 김원섭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건물이 붕괴된 원인은 한계중량을 초과한 하중 때문은 아닙니다. 건물 상층부에 어떤 충격 때문인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린 그가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밀어 넣고는 우물거리다가 뱉어냈다.

“911테러처럼 건물 상층부에 어떤 충격을 받고 붕괴된 겁니다. 하중 때문에 주저앉았다면 아래층이 저렇게 온전할 리가 없죠.”
나는 김원섭의 진지함에 잠깐 귀를 기울였지만 곧 흥미를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이 파괴된 지금 원인에 대한 통찰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의 차가움을 눈치 챘는지 헛기침을 한 김원섭은 홀로 토라져있는 부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바라본 7호 병동은 병원이라기보다는 옛날 교회처럼 보였다. 붉은색 벽돌 건물과 하얀 대리석을 띠처럼 두른 우윳빛 창문에서는 사람의 흔적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야트막한 대리석 계단 위에 자리 잡은 현관문은 두꺼운 쇠사슬이 달린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온 일행들은 현관 근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숨을 헉헉거렸다. 비닐 우의를 벗어 던진 차재경이 점퍼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잠겨진 현관문을 열었다. 안에 갇혀있던 눅눅한 공기가 우리들을 맞이했다. 누군가 켠 플래시가 병동 안을 비췄다. 80년대 고등학교처럼 턱없이 큰 거울과 도자기로 만든 커다란 화분들이 사열을 받는 병사들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입김들이 건물 안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고,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직 앞장서 걷는 차재경의 뒷모습과 그 옆에 선 사제가 든 플래시 불빛만 따라갈 뿐이었다. 차가운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치는 으스스한 복도를 한참 걷다가 우연히 텅 비어있는 상황판 위의 시계를 볼 수 있었다. 굵고 짧은 바늘은 6을 좀 더 가늘고 긴 바늘은 10과 11사이를 정확히 갈라놓고 있었다.

“여섯시 오십분...”

병원이 붕괴된 지 두 시간이 조금 모자란 시각이었다. 두 시간 전 만 해도 난 주룩주룩 내리는 비와 장사가 안 되는 조그만 편의점에 대해서 못마땅하게만 생각하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칭 구조대라는 사람들 틈에 껴서 경찰을 속이고 도둑처럼 병원에 잠입하고 말았다. 앞장선 차재경이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진실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가 그 어떤 사실들만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만을 풍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일행들과 헤어져서 혼자서라도 가족들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아내와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 자칭 병원장이라는 차재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내와 아이는 이곳에 있는 게 분명할 텐데...
생각은 일행의 움직임이 멈추면서 함께 멈췄다. 좁고 낮은 복도를 한참이나 지나서 도착한 곳은 넓은 로비였다.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긴 의자들이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녹색 셀로판지를 붙여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든 약제실들이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워매, 옛날에 집사람이 아플 때 왔던 병원 같은디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럽네.”

그에게 무거운 가방을 넘겨주었던 이무생의 눙치는 말투가 사람들 사이의 정적을 깨트렸다. 여기저기서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나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은 젊은 남자의 말이 들려왔고, 우두커니 서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한 사람 대신 차재경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던 벽 쪽에 서 있던 차재경이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위치를 올리자 로비의 형광등이 일제히 켜졌다. 환하게 터진 빛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눈을 껌뻑거렸다.

“일단 장비부터 나누겠습니다. 이무생 씨?”

“자자, 남자들은 다 이리 오시오. 선생님이 시간만 쪼간 더 줬으면 더 멋진 걸 만들었을 텐디, 우선 아들놈이 가지고 있는 가방 안에는 안전모랑 헤드램프가 있을껴. 빳데리는 다 새 걸로 끼우고 확인했응께 하루쯤은 너끈할 껴.”

이형주라는 명찰을 목에 건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은색 가방의 지퍼를 쭉 잡아당기자 공사장에서 쓰는 하얀색 안전모와 밴드가 달려있는 헤드램프가 보였다. 사람들은 이형주가 나눠준 안전모와 헤드램프를 신기하다는 듯 만지작거렸다.

“무슨 동굴 탐사라도 하러 가는 겁니까? 안내장에는 이런 장비가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는 없었는데요.”

아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던졌던 목소리가 또다시 짜증 섞인 말투로 차재경을 몰아세웠다. 세상을 살면서 별다른 고생을 해 보지 않은 것 같은 이형주 또래의 젊은 청년은 몸통이 너끈히 들어갈 정도로 통이 큰 힙합바지에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 쓰인 하얀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이 입원해있던 임상실험센터는 이 건물 지하에 있습니다. 본관 건물이 붕괴된 여파로 임상실험센터 내부의 전원과 동력이 모두 차단되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준비한 겁니다.”

“이론상으로는 비상동력이 들어왔을 겁니다. 기본적인 조명등과 방향 지시등이 있어서 아주 어둡지는 않을 테지만 주 전원이 나갔다면 천정의 조명등은 모두 작동 불능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불쑥 나선 김원섭의 말에 다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이무생이 다른 가방을 열면서 떠들기 시작했다.

“이건 위험하니까 남자들만 챙기셔. 손 안 다치게 조심들 허고, 형주야.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사람들한테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 줘.”

두 번째와 세 번째 가방에서 나온 것은 끝에 검은 천이 뒤집어 씌워진 하얀 알루미늄 봉이었다. 이형주가 가운데 레버를 돌려서 확 잡아뽑자 어른 키보다 조금 짧았던 봉은 단숨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끝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을 벗겨내자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더 긴 삼각형 창날이 보였다.

“이건 창이여, 창, 꽉 찌르면 피가 팍 쏟아지는... 요기 창날은 자동차 범퍼를 짤라다가 만들어서 가볍지만 탄탄혀. 아래쪽에 붙은 날은 피가 튀거나 창날이 너무 깊이 박히지 않게 하려고 만든 것이고, 요기 이건 후레쉬여, 후레쉬. 요기 중간에 있는 빨간 스위치를 누르면... 짠허고 빛이 나와 빛이...”

창날 아래 달린 작은 플래시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자동차 범퍼로 만들었다는 창날을 더 창백하게 만들어버렸다. 로비 구석으로 걸어간 이무생은 머리에 쓴 헤드램프와 창날 아래 달린 후레쉬 불빛을 가득 머금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다가 거울에 창을 겨누었다.

“이렇게 싸우다가 위기에 처했다. 그럼 빨간 스위치 옆에 있는 검은색 스위치를 눌러. 그럼...”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창대에서 튕겨나간 창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울 위쪽에 박혔다. 부르르 떨리는 창날을 따라 길고 가는 금들이 거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놀란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가라앉자 이무생이 히죽 웃었다.

“소심들 허기는... 그럼 창날이 빠진 창대는 그냥 버리느냐? 그러지 말고 여기 위쪽 봉을 쑥 잡아뽑으면 다른 날이 요로코럼 숨겨져 있어. 거 머시냐, 형주야. 그 영화가 머라고 했지.”

“슬레이어요.”

심드렁한 아들의 대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난 이무생이 떠들었다.

“그 영화보먼 흡혈귀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이 이런 걸로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와.”

“아니 그럼 이걸로 가족들을 사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일단 들어봅시다. 저 아래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짧은 머리를 한 젊은 여성의 말에 하얀 머리의 중년 사내가 대꾸했다. 그 사내의 명찰에는 이대백이라 씌어 있었다.
신이 난 이무생이 가스 토치 같은 걸 손에 들고 설명했다.

“요기 이건 화염방사기여. 뭐 대단헌건 아니고 코베아 가스 토치에 살충제를 연결혀서 만든건디 제법 불이 잘 붙지. 다들 비켜보셔. 생각보다 멀리 나가니까.”

이무생이 다음 가방에서 꺼낸 것은 갈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가스 토치였다. 권총같이 생긴 가스 토치 아래에는 둥근 휴대용 가스와 다른 통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권총 손잡이쯤 되는 위치의 노란 레버를 돌리자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끝에서 파란 불꽃이 터져 나왔다.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의 시선 위로 불꽃을 돌린 이무생이 신이 난 듯 덧붙였다.

“요기 보먼 철사로 만든 방아쇠 비슷한 게 있어. 일단 가스 토치에 불을 붙이고 요걸 누르면...”

펑 소리와 함께 붉은 불꽃이 가스 토치 끝에서 터져 나왔다. 먼지 낀 천장 구석의 거미줄이 순식간에 끊어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창은 남자들이 쓰고 요건 여자들이 가지고 댕기셔. 그리고 선생님. 총도 나눠줍니까?”

“총?”

총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층 더 커졌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흠뻑 만끽한 이무생이 능글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따, 놀라기는... 내가 명색이 공업사 사장이여. 쇠랑 공구만 있으면 비행기랑 항공모함 빼고는 다 만들 수 있당께.”

“잠깐만요. 구조를 하러 들어간다고 해 놓고는 얼토당토않게 무기를 들고 가라는 건 무슨 소립니까?”

아까보다 좀 더 우려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30대 사내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의 요란한 심장박동을 상징하듯 김길수라고 적혀있는 명찰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차재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을 했다.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러분들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입원해있는 임상실험센터에서는 아직 공인되지 않은 시약을 이용한 실험을 하고 있던 곳입니다. 일차로 동물들에게 투약을 했고, 투약된 동물들도 저 아래 환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실험 결과가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약을 투여 받은 동물들에게서 공격적인 성향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럼 그 약을 제 아들에게도 투약했다는 말인가요?”

작은 체구의 중년부인이 떨리는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물었다. 손에 눌린 명찰에는 이정자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차재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로 동물실험을 하긴 했지만 환자 가족들의 동의하에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에게도 일부 투약을 했습니다.”

“제 약혼녀는 강도에게 죽었단 말입니다. 죽은 그녀를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장례까지 치렀는데 무슨 헛소립니까?”

“갑선이는 안 죽었어.”

무겁고 딱딱한 목소리가 김길섭의 말을 가로막았다. 김길섭 또래의 사각형 턱을 가진 사내는 오희섭이라는 이름의 명찰이 매달려있었다.


작가 소개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시작으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쳐 길을 쓰고 있다. 소설과 교양서를 비롯해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다.
장편소설 『폐쇄구역 서울』 『마의1, 2』 『쓰시마에서 온 소녀』 『김옥균을 죽여라』 『바실라』 『명탐정의 탄생』 등을 썼으며,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시리즈에 〈불의 살인〉을 비롯한 단편추리소설들을 발표했다.
역사 교양서 『연인, the lovers』 『혁명의 여신들』 『조선의 명탐정들』 『조선전쟁 생중계』 『고려전쟁 생중계』 『조선직업실록』 『조선백성실록』 등을 펴냈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 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미스터리작가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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