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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To be, or not to b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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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셰익스피어(1564~1616)는 잘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 읊어 본 대사가 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푸념처럼 내뱉기도 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 3막 1장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독백이다. 영어로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다. 대학 때 영문학을 맛보았기에 이 대목을 암기해 시험을 치른 적이 있다. 데이트할 때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올 한 해 문화계가 분주했다.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잇따랐다. 그중 눈길을 끌었던 게 ‘To be, or not to be’ 번역이다. 최근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와 설준규 한신대 명예교수가 이 대사를 새롭게 풀어냈다. 1923년 연극인 현철이 옮긴 『하믈레트』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장 많이 입에 오른 게 ‘사느냐, 죽느냐’였다.

이 교수는 ‘존재냐, 비존재냐’로 옮겼다. 시인 셰익스피어, 철학도 햄릿의 캐릭터를 살피고 여기에 우리말 4·4조 리듬을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설 교수의 번역은 제법 새롭다. ‘이대로냐, 아니냐’로 풀었다. 이 대목은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넘어설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번역 또한 늘 변화하는 생물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지금 우리는 선왕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햄릿보다 더한 고뇌에 빠져 있다. 말 그대로도 생사의 갈림길이다. 설 교수의 말을 빌리면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점검이 필요한 때다. 촛불 민심으로 유폐된 대통령은 둘째 치고 ‘너 죽고 나 살기’로 다퉈서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정치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계층 간 이동이 막히고, 하위층 소득이 급락한 최근의 통계가 씁쓸하기만 하다. 자신이 최하층에 속한다고 응답한 국민이 12년 전에는 12%에 그쳤지만 지난해에는 20%까지 급증했다. 특히 한창 일할 30대의 57%가 자녀의 계층상향 가능성에 비관적이었다.

지난 7주간 광화문광장의 함성은 새로운 한국에 대한 열망이었다.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표현도 잠시 수그러들었다. 시민이 이끄는 민주주의의 재도약을 확인했다. 그 에너지를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 국정 농단보다 더 가파른 언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햄릿으로 돌아가면 ‘환난의 바다’ ‘세상살이 채찍질’ ‘압제자의 횡포’에 맞서 무기를 들 때다. ‘이대로냐, 아니냐’를 고를 문제가 아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