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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통령의 하룻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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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상언 사회2부장

이상언 사회2부장

2013년 11월 5일에 들은 이야기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영국 국빈방문 중이었고, 나는 런던 특파원이었다. 대통령은 전날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와 버킹엄궁에 머물고 있었다. 대통령 방문 준비단에 속해 있던 런던 주재 한국 공무원은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시작은 침대였다. 대통령이 투숙할 호텔 객실의 침대 매트리스를 청와대 주문에 맞춰 새것으로 바꿨다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원한 침대 ‘스펙’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바꿔도 되겠느냐고 호텔에 문의했다. 호텔에서 원하는 것을 알려 달라고 하더니 교체해 놓았다. 비용도 호텔이 댔다. 자기네 것에 불만이 있다고 여겨 다소 불쾌해하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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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설명을 하자면 박 대통령은 4일 밤에 도착해 이 호텔에서 하룻밤만 지내면 됐다. 다음 날 오전에 영국 여왕이 보낸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가 2박3일을 그곳에서 묵게 돼 있었다. 호텔은 하이드 파크 건너편에 있는 5성급이었다.

그 공무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투숙할 방에는 전자레인지가 설치됐다. 호텔 음식이 아닌 별도로 마련한 음식을 아침 식사로 준비하기 위한 용도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대통령이 ‘혼밥’을 즐긴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그는 서울에서 온 것으로 욕실 샤워 꼭지도 바꿨다고 했다. 손잡이 부분을 눌러야 물이 나오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1박 동안 한두 번만 쓸 샤워 꼭지였다.

가장 믿기 어려운 부분은 객실에 조명등 두 개와 스크린 형태의 장막을 설치했다는 대목이었다. “대통령이 머리 손질과 화장을 하는 곳은 대낮처럼 밝아야 하며, 대통령이 거울 보는 곳의 뒤편에 흰 장막을 쳐 거울 속에 대통령의 모습이 비칠 때 다른 사물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문이 있었다고 그가 설명했다.

기사 욕심이 발동했으나 이내 마음을 접었다. 발설자로 지목됐을 때 그가 치를 고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의전에 관한 사항은 공무상 비밀이다. 최근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다이어리에 ‘색출’ ‘응징’ 등의 상부 지시가 적혀 있던 것을 보면 그 역시 공무원 생활을 접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준비 작업이 대통령 뜻에 따른 것인지, 담당자들의 ‘과잉 의전’에 의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기도 했다.

묻어 둔 이야기를 뒤늦게 꺼낸 것은 이제는 왜 단 하룻밤을 위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이상언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