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홍승일의 시시각각

전경련이 헤리티지? 그 머나먼 길

중앙일보

입력 2016.12.12 18:47

업데이트 2016.12.1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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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홍승일  논설위원

홍승일
논설위원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고객 무시한 시장의 업보
해체 버금가는 개혁 시급

“경제5단체를 열거하는 신문기사를 보면 전경련을 맨 앞에 쓰는 관행이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설립된 연륜으로 보나 회원기업 수로 보나 상공회의소가 경제단체의 좌장 격인데···. 하다못해 가나다 순서로도 대한상의가 전경련보다 먼저 아닌가요(웃음).”

농반 진반이었겠지만 떠올릴수록 뼈 있는 말이었다. 박정희 정권 이후 수십 년간 재계의 간판 뉴스메이커였던 전경련의 퇴락 조짐이 완연하던 시절이었다. 전경련은 1997년 외환위기를 분수령으로 그 위상과 대중적 관심이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공중분해된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끝으로 재벌 총수들은 전경련 수장 자리를 극구 고사했다. 10년을 지속한 진보정권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전경련의 ‘회장 구인난’은 일본 재계의 본산 게이단렌(經團連)과 확연히 대조됐다.

그렇게 십수 년, 전경련은 마침내 존폐 기로에 섰다. 실패에서 배우지 못한 탓이다. 경영학 개론 식으로 말하면 고객을 무시한 업보였다. 전경련이 1961년 창립 때 내세운 ‘고객 헌장’을 보면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올바른 경제정책을 구현하고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한다’고 되어 있다. 기업과 국민을 떠받들겠다고 다짐해 놓고 조직의 핵심역량을 엉뚱한 데 퍼붓다가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됐다.

최순실 사태로 대기업 총수들의 난처함은 이만저만 아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국회 청문회 석상에서 이런 전경련에 “회비를 내지 않겠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진성(眞性) 고객들이 더 이상 ‘전경련’이란 상품을 구매하지 않겠다고 나서자 공공기관과 금융회사 회원들도 ‘불매운동’ 행렬에 섰다. 한때 재계의 맏형 노릇을 해 온 전경련은 대통령 탄핵 이튿날 열린 경제5단체 긴급대책회의에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일찍이 2000년대 초반에 전경련이 ‘인기상품’ 진열대에서 슬그머니 빠지기 시작한 것은 삼성·현대·SK·LG 같은 큰 고객들의 높아진 안목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헤리티지재단 같은 싱크탱크는 환골탈태의 대안이 될까. 전경련 내부 사정에 밝은 전직 고위간부들 이야기는 ‘아니올시다’다. 고객의 의중을 헛짚었다는 것이다. 헤리티지가 어떤 곳인가. 고작 600여 회원을 거느린 전경련과 달리 소액기부를 포함해 수십만 명 지지자·기업들의 헌금으로 굴러가는 미국 보수 이념의 전당이다. “우리나라엔 기업이든 개인이든 헤리티지처럼 특정 이념과 권익 대변 활동에 기꺼이 지갑을 열 불특정 다수 계층이 매우 엷다.” 전경련 임원을 지낸 이병욱 박사의 헤리티지 근무 경험담이다. 빛 바랜 ‘전경련’ 브랜드로 풀뿌리 펀딩을 하는 것도 언감생심이다. 일부 대기업이나 재산가를 전주(錢主) 삼은 폐쇄적 연구 플랫폼으로는 개방성·투명성·공정성을 두루 갖춘 구미의 선진 싱크탱크를 본받기 힘들다.

최근 국회의원과 주요 기업 임원, 학자 등 5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방향이 잡힌다. “해체 수준의 개혁, 아니면 해산하라”는 게 답이다. 섣부른 싱크탱크 논의에 앞서 정면도전해야 할 과제부터 풀어야 한다. 특히 회원사와 사무국 간의 ‘대리인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이번에도 대리인인 전경련 부회장이 사고를 쳤다. 아무리 대기업 오너들의 아성이라도 대리인이 득세하면 국민들과 괴리된다. 사무국이 회원사에 군림한다. 일본 게이단렌도 자민당 장기 집권기에 정치인·관료와 ‘어둠의 3각 유착 트라이앵글’을 형성하면서 각종 비리와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뼈를 깎는 자구노력 끝에 공익추구 경제단체로 거듭났다.

요컨대 경제단체의 고객은 누구이며 무얼 원하는지 직시하면 해답이 나온다. ‘정경유착 종식’이라는 광장의 성난 함성보다 무서운 것이 경제단체 시장에서의 고객 외면이다. “우리나라에 경제단체가 너무 많다”는 여론에 전경련은 귀를 기울일 때다.

홍승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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