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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민심의 키워드, 박대통령·촛불·세월호 순 많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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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7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무대 공연을 보고 있다. 이날 집회는 별다른 소동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사진 오종택 기자]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7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무대 공연을 보고 있다. 이날 집회는 별다른 소동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사진 오종택 기자]

“1차 집회 때부터 자유발언을 신청했는데 이제 겨우 단상에 서게 됐네요. 떨립니다.” 7차 촛불집회가 열린 10일 오후 10시 경복궁역 인근의 트럭을 개조한 단상에 한 남성이 올라섰다. 자신을 30대라고 밝힌 그는 “1970~80년대에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지킨 당시의 어른과 대학생들에게 감사 드린다. 우리도 어린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물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7차 집회 시민 자유발언 분석
사드·국정교과서·노동문제 등
탄핵 이후에 대한 논의도 활발
“이 기회에 비리·부패 악순환 끊고
사회 갈등 푸는 동력으로 삼아야”

일곱 차례의 촛불집회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가 자유발언이다. 하루에 수십 명씩 단상에 올라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쳤다. 특히 집회 장소가 서울 광화문광장을 벗어나 경복궁역과 청운효자동주민센터 등으로 넓어지면서 발언대도 그만큼 늘어났다. 본지는 10일 곳곳의 단상에 선 25명의 자유발언을 기록해 주요 단어를 분석했다.

가장 많이 언급된 표현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25명 모두 한 번 이상 말했다. 박 대통령 측은 “최순실에게 속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발언자 중 어느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다. ‘촛불’을 언급한 이는 모두 17명이었다. 발언자들은 ‘촛불의 승리’ ‘촛불의 심판’ 같은 표현으로 탄핵안이 가결된 것을 축하했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비폭력 촛불집회는 합법적인 주권 행사였고, 국회의 탄핵안 가결과 헌법재판소 심리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이끌었다. 촛불은 주권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고 설명했다.

세월호(12명) 및 그와 관련된 ‘7시간(3명)’을 언급한 발언자도 많았다. 최순실 국정 농단을 파헤치던 언론 보도가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석연치 않은 7시간에 집중된 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한 여성 대학생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처를 잘못했고, 7시간을 명쾌히 밝히지 않았을 때부터 박 대통령은 이미 국민에게서 퇴출당했다”고 말했다.

탄핵(12명)·퇴진(11명)·정치(11명)도 자주 거론됐다. 촛불집회의 성과가 곧 탄핵안 의결이지만 탄핵이나 퇴진은 앞으로 있을 정치계 전체 개혁의 시발점이라는 취지의 발언이 많았다. 18세 고교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발언자는 “박 대통령이 내려온다고 되풀이돼 온 비리와 부패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번 기회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회의 초점이 최씨 국정 농단과 탄핵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다양한 정책 이슈로 확장됐다는 점도 확인됐다. 실제 최순실(3명)을 언급한 발언자보다 역사·사드(THAAD)·국정교과서(각 5명)를 언급한 이가 많았다. 발언자들은 노동(9명)·비정규직(6명)·해고(5명)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노동 이슈를 언급했고, 재벌(6명)을 거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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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박근혜 탄핵’이라는 큰 이슈 아래에 다양한 불만이 잠복해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 절실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순실 사태는 역설적으로 성·연령·계급을 뛰어넘는 사회 대통합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정치권은 이 에너지를 활용해 우리 사회의 한 편에 방치돼 있다시피 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수 교수도 “대통령 탄핵이라는 깃발 아래 모였지만 시민들의 처지와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우리 사회가 ‘촛불민심’을 빈부격차나 사회 정의의 문제 등 근본적인 갈등 요소를 완화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치구조 변화와 정권 교체에 국민 관심이 집중되는 사이 노동과 분배의 문제를 깊이 살펴보지 못했던 1987년 6월항쟁 직후의 경험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글=윤정민·윤재영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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