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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현상’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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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어차피 문재인에게 올 표들인데 뭘….”

야권은 물론 여권성향 유권자도 ‘이재명’
기성정치권 신물 난 민심의 선택 주목해야

문재인 발목까지 치고 올라온 이재명 성남시장의 지지율을 놓고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은 문재인에 실망한 좌파나 정의당 지지층이 이재명에게 간 것으로 본다. 민주당 대선후보가 문재인으로 확정된 순간 다 문재인에게 넘어올 표라는 것이다. 이재명의 지지율 급증은 문재인의 외연이 확대된 것이란 주장이다.

꿈 깨셨으면 좋겠다. 이재명의 지지층이 문재인보다 왼쪽에만 있다면 혹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문재인보다 오른쪽 사람들, 즉 박근혜 지지층이었던 영남 유권자들이나 반기문 지지층에서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업체 대표는 “영남 청장년층의 30%가 이재명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재명은 문재인이나 민주당의 확장이 아니라 여야를 포괄한 기성 정치권 전반에 신물 난 민심의 표출이다. 대선이 기득권 대 반(反)기득권 구도로 치러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예측도 가능하다.

이번 대선의 화두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공정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극소수 가진 자들이 특권을 휘두르고 반칙을 일삼는 ‘헬조선’을 혁파하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줄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겠다는 게 민심이다. 새누리당은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도 혁파 대상인 기득권 세력일 뿐이다. 그런 국민들에게 이재명은 시대가 요구하는 아이콘으로 여겨지기 충분하다. 그의 사이다 화법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최순실 태블릿’이 보도된 다음날 문재인은 ‘거국내각’을 읊었지만 이재명은 ‘박근혜 하야’로 치고 나왔다. 박근혜가 ‘무늬만 사과’ 담화문을 낸 직후엔 ‘탄핵’을, 탄핵이 공론화된 시점에선 ‘구속’으로 한 발씩 앞서나갔다. 좌고우면하다 스텝이 꼬인 문재인·안철수를 따돌린 건 이렇게 국민이 원하는 말을 콕 집어 적시에 터뜨린 감각 덕분이었다. 흙수저 출신답게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며 익힌 ‘민심 독심술’ 덕분이다.

그의 팔을 보면 안다. 보기 흉하게 굽어 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소년 시절, 학교 대신 다니던 공장 프레스에 손이 눌려 성장판이 멈춰 버렸다. 형수에게 막말하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었지만 ‘금수저’들에 가위눌린 사람들에게 이런 스캔들이 얼마나 영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이념의 틀을 뒤흔드는 전략도 눈에 띈다. 이재명은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전임자 시절 빚투성이였던 재정을 흑자로 돌려 놓았고 예산을 최대한 아껴 남는 돈은 죄다 복지에 배정한다. 보수적 성향의 시민들조차 “성남이 살기 좋아진 걸 피부로 느낀다”고 한다. 이런 성과 때문에 그는 이념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로 여겨지기 쉽다. 그 자신은 아예 자신을 보수로 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가치(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분배정의)를 철저히 신봉하고 실천하는 게 보수가 아니면 무엇이 보수냐는 것이다. 입으로만 법치를 외치며 국정 농단을 일삼은 박근혜 정권이 가짜 보수라면 자신은 진짜 보수, 그리고 진보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의당 정도라는 것이다.

물론 이재명은 포퓰리스트적인 성향이 분명히 있다.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친 비주류 중 비주류다. 기득권층과 맞짱 뜨지 않고선 주목 받을 수 없다는 계산 아래 자극적인 행보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실적은 확실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이다. 게다가 박근혜 시대를 거쳐 오면서 국민은 보수·진보의 낡은 이념 틀이 좌우 기득권층의 잇속만 챙겨 주는 기만극임을 절절히 깨달았다.

그렇기에 상당수 대중들은 이번에 이재명을 호명했다. 그는 위험한 포퓰리스트이니 대통령으로 뽑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제거해도 제2, 제3의 이재명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번 대선의 본질은 그 개인이 아니라 기성 정치권의 대개혁을 바라는 민심이기 때문이다. 이 민심에 부응하는 후보가 대권을 잡을 것이다.

브렉시트, 두테르테, 트럼프…. ‘포퓰리스트’란 욕 한마디로 기성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를 덮고 유권자의 선택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올 한 해 전 세계에서 잇따라 실패했다. 대한민국도 그런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역대 어느 대선보다 커지고 있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