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무효표 의원들의 직무유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박유미
박유미 기자 중앙일보 정당출입기자
박유미 정치부 기자

박유미
정치부 기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에선 7장의 무효표가 나왔다. 찬성(234명)도 반대(56명)도 아닌, ‘도저히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백지를 낸 기권표(2명)도 아니었다. 규정에 맞지 않는 오기(誤記)의 결과이자 국회의원의 책임과 권리를 저버린 행태였다.

표결은 국회법에 따라 무기명으로 진행됐다. 본회의장 한쪽에 마련된 부스로 들어가 찬성은 ‘가(可)’, 반대는 ‘부(否)’를 한자나 한글로 적어냈다. 혹시 기표 내용이 보일까 봐 국회 직원들이 서서 가림용 커튼을 일일이 닫아 주었다.

국회 의사국과 감표위원들이 전하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7장의 무효표 중에 2장은 ‘가’를 적은 뒤 각각 점을 찍거나 동그라미를 그렸다. 국회에서 미리 안내한 대표적인 ‘무효표’ 사례다. 나머지 표들은 ‘가부’를 동시에 적거나 ‘가’나 ‘부’를 쓴 후 그 위에 엑스자를 그려 지우고 다시 쓴 표였다고 한다. 가부를 동시에 쓴 표 중엔 심지어 한자도 ‘否’ 대신 ‘不’로 적었다. 한글로 ‘기권’이라고 쓴 표도 있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국회에서 잘못된 표시 사례를 미리 안내했고, 20대 국회 들어서도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경험 등이 있어 처음도 아니었다. 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때도 무효표는 3장뿐이었다.

감표위원인 새누리당 정태옥 의원은 “가나 부를 겹쳐 쓴 표들은 기표소 안에서 마음이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감표위원인 새누리당 김현아 의원도 “실수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무효표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찬성이 아닌 표’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효표는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이 던졌을 가능성이 크다. ‘나를 공천해 줬는데…’ ‘지역이 영남이라…’처럼 민심보다 의리를 고민하다 무효표를 만들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야당이나 비박계 의원들이 정치적 계산에 따라 무효표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국회법상 인사에 관한 안건과 탄핵소추안 등은 무기명 투표로 표결한다. 소신껏 투표하되 무기명의 장막 뒤에 숨어 장난을 치라는 게 아니다. 반대였다면 반대, 찬성이라면 찬성, 기권이라면 기권을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차라리 친박계 핵심인 최경환 의원은 투표에 불참했다. 여론과는 다른 결정이라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했다는 점에선 무효표의 주인공들이 반성해야 한다.

탄핵안이 본회의에 오르기까지 국민은 6주째 촛불을 들었다.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광화문광장 등에 모였지만 선진적인 집회 문화를 보여줬다. ‘무효표 7장’은 그런 국민의 수준보다 한없이 후진적인 정치인들의 부끄러운 민낯이자 직무유기였다.

박유미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