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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경쟁국이 시비 걸기 시작한 구조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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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뜨거운 감자’ 해운·조선산업 구조조정 문제가 급기야 통상협정 영역으로 옮겨 가고 있다. 이달 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선 작업반(working party) 회의에서 일본은 우리 정부가 10월 31일 발표한 ‘조선·해운 경쟁력 강화 방안’이 국제시장에서 공정 경쟁을 저해한다며 통상협정 위반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은 이미 2015년에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이번 구조조정 계획에 여러 국가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은 점차 확인되고 있다. 이 분야에서 우리와 경쟁하는 유럽연합(EU)·미국·중국 등 여러 국가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조선·해운 지원해 통상협정 위반”
일본, OECD·WTO에 잇따라 제기
금융시장 안정 명분 분명히 하고
정부·민간 역할 나눠 빌미 안 줘야

구조조정은 정부와 금융기관이 공동으로 특정 산업 영역의 재조정 내지 재편을 도모한다는 속성상 통상협정에 대한 저촉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한 산업 영역에서의 구조조정이 통상분쟁 없이 넘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에 견줄 만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그간 우리 내부의 논의는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통상협정을 원용하며 그러한 구조조정에 정부가 전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반대쪽에서는 주요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정부의 책임이며 정부 ‘주도’하에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통상협정이 요구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정확히는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관여는 허용되나, 다만 그 방식이 문제일 뿐이다. 통상협정이 요구하는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그간 우리는 우왕좌왕해 왔다.

통상협정 규범이 요구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정부와 민간 부문의 역할을 나누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정부가 시장 감독 기능은 수행하되 구체적인 구조조정 의사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부의 임무는 구조조정 진행 상황의 확인과 감독에 국한되고 구체적 내용과 조건의 도출은 금융기관 등 시장의 의사결정자에게 맡겨 둬야 한다. 요컨대 정부는 경기의 감독자 내지 경기장의 감시자이며 경기에 선수로 참여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닥치자 미국은 자국 금융기관과 주요 산업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들의 구조조정에 적극 관여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씨티그룹 등 주요 은행은 물론 GM·크라이슬러 등 주요 기업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EU 역시 마찬가지다. 2008년 이후 110여 개에 이르는 역내 은행에 대한 구조조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 유럽 각국 정부 역시 자국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에 긴밀히 관여하고 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들 구조조정에 대해 그 후 통상협정 측면에서 큰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것은 바로 정부의 관여가 이러한 역할 분담에 따라 ‘정제’된 방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상협정이 허용하는 ‘정제’된 관여의 구체적 모습은 무엇인가. 그 골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다수의 채권은행이 관련된 경우 이들의 건전성 확보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의 감독 권한 행사는 문제가 없다. 그 맥락에서 이들에 대해 정부가 어떠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 역시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특정 산업을 진흥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일반적인 거시 산업정책의 맥락에서 구조조정의 진행 상황을 감독하고 조율하는 것도 정부의 정당한 산업정책 행사로 간주된다. 반면 이해당사자들의 구조조정 논의에 정부 담당자가 직접 참여하거나, 이들에 대해 정부가 구조조정을 강제하거나 특정 내용을 담은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항상 문제가 된다. 그간 우리 정부의 관여는 국내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양쪽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정부·민간 역할 분담에 대한 고민 없이 ‘전원 공격, 전원 수비’로 혼돈스럽게 진행되다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내 소관 사항은 아니므로 책임이 없다는 해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는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며 민간 부문의 책임 역시 가볍지 않다.

향후 정부가 구조조정에 관여할 때에는 이러한 정당한 정책 목표를 사전에 분명히 표방하고 이에 부합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구조조정은 과감하게 정부의 감독하에 추진돼야 한다. 이 원칙만 지켜져도 대부분의 협정 위반 소지는 적절히 비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 중인, 그리고 앞으로 진행될 일련의 구조조정과 관련해 정부, 산업계, 금융기관 간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역할 분담을 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리 작업이 필요하다. 감독이 선수로 경기에 나서거나 선수가 감독 역할을 하고자 하면 배는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정제되지 않은 정부의 관여는 한국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여러 국가의 문제 제기와 통상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부담은 수출 전선에서 우리 기업들이 고스란히 지게 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구조조정 문제가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통상분쟁의 한 토막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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