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홍해의 길목, 인도양의 출구 몸바사엔 ‘일대일로’ 그림자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09호 26면

‘아프리카의 뿔’ 바로 아래 위치한 천혜의 항구 케냐 몸바사는 아프리카의 꽃으로 불린다. 동부 아프리카는 정화원정대의 최종 목적지였다. 사진은 몸바사의 향료 시장. [사진 주강현]

1년여를 함께해온 해양 실크로드 문명 대탐사는 동아프리카에서 마무리된다. 로마와 인도, 중국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홍해를 거쳐 지중해로 나아가는 길이 중요했기에 지난 호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다뤘다. 그러나 해양문명사의 거대 역사로 본다면 역시 인도양에 면한 동아프리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케냐·탄자니아·에티오피아 등은 루시 등 현생인류의 족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 인도양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그리고 인도, 중국이 하나로 연결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케냐 몸바사는 한국으로 치면 인도양으로 열린 부산항이다. 케냐 해안의 무역과 항구 연구로 박사를 받은 마틴(리버풀대학)은 몸바사를 “동부아프리카에 활짝 핀 아프리카의 꽃”으로 표현했다. 바스코 다 가마가 몸바사에 당도한 해는 1498년. 적대적인 원주민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고자 1589년 거대한 성을 마련했다. 몸바사 시내에서 택시기사에게 지저스성을 말하면 어떤 곳에서나 10여 분 이내에 데려다 준다. 포르투갈인은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대표로 사명을 갖고 이곳에 당도했다고 믿었기에 성채를 ‘지저스’라 거룩하게 작명한다. 동아프리카에 ‘예수님의 성’이 완성된 것이다. 그때부터 1741년 오만의 술탄이 몸바사 완전 점령에 성공하기까지 아라비아의 오만과 포르투갈은 엎치락뒤치락 공방전을 벌인다. 유럽으로서는 그만큼 동아프리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는 인도양 공략의 교두보]

1 케냐 몸바사의 지저스 요새. 이곳에 진출한 포르투칼인들이 세웠다.

희망봉을 돌아서 모잠비크를 거쳐 동아프리카를 접수하면 인도양 공략에 결정적 교두보가 확보된다. 동아프리카는 오랜 세월 이슬람의 집중 공략으로 ‘무슬림의 바다’로 접수된 상태였기에 혹자는 아예 인도양을 ‘이슬람의 호수’로 명명했다. 이러한 바다에 거점을 마련함은 유럽세력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오늘날 소말리아가 점령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뿔’은 홍해의 길목이자 인도양의 출구다. 그런 면에서 아프리카의 뿔 바로 아래에 위치한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춘 몸바사가 주목받은 것이다.


무슬림세력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오랜 싸움 끝에 결국 포르투갈을 쫓아냈다. 포르투갈이 전방위적으로 아시아 바다를 식민화시킨 것으로 착각도 하나 그네들은 전략적 포스트에 성채를 마련하여 항로를 관리하였을 뿐, 온전히 나라 전체를 식민화하여 경영한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게다가 유럽식 역사관에 중독된 한국식 세계사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 중심의 역사를 가르칠 뿐, 아랍이나 아프리카원주민의 해양사는 배제되어 있다. 포르투갈이 인도로 나아갈 때, 고작 원주민 수로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 정도로만 기술된다. 유럽세력이 당도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인도양을 무대로 바다를 넘나들던 스와힐리문명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부인한다. 아프리카 해양사는 ‘부인된 역사’이고 ‘몰각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해양 실크로드 대탐사의 마지막 행로를 아프리카로 설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2 인도네시아 요그야카르타 보르부드르사원의 대항해 부조. [사진 주강현]

[아프리카·아랍·인도 결합된 스와힐리문명]
스와힐리문명은 모잠비크 북부로부터 소말리아 남부에 이르는, 물경 1500㎞에 달하는 광범위한 동아프리카 연안에 퍼져 있다. 아프리카원주민문화와 아랍문화, 인도문화 등이 결합돼 만들어진 스와힐리문명권은 언어와 풍습 등에서 단일 영역을 확보한다. 탄자니아·케냐·우간다 식의 국민국가는 유럽제국의 금긋기로 탄생한 것일 뿐, 이들 나라끼리 스와힐리어 소통에 장애가 없다. 대개 한국인이 생각하듯이 동부 아프리카 해변에는 까만 얼굴의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원주민, 아랍, 인도 게다가 15세기 이래로 유럽인 핏줄까지 섞여서 인종박람회장을 방불케 한다.


몸바사 지저스 성채 인근의 ‘올드타운’은 일명 ‘아랍타운’이기도 하다. 무수한 아랍인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미로같이 얽힌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피부색은 아랍인이 분명한데 모두다 스와힐리어를 쓰고 있다. 올드타운의 어시장에서 만난 무하마드 자크라(65세)는 이렇게 영어로 말했다.


“우리 조상은 아라비아 오만에서 300년 전에 넘어온 것으로 압니다. 장사하러 왔다지요. 보통 때는 스와힐리어를 쓰지만, 모스크에 가서 기도할 때는 아랍어를 쓰지요.”


해양 실크로드를 탐사하면서 일상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바람이다. 언제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갔고, 언제 바람이 불어서 어디서 왔다고 어부나 선원이나 할 것 없이 말한다. 방글라데시에서도 그러했고, 이란에서도 그랬다. 여기 몸바사에서도 바람을 이야기한다. 탄자니아 잔지바르의 인도양연구소장 압둘 셰리프는 인도양 문명을 일으킨 거대한 힘은 ‘몬순의 바람’이라 단언했다.


그 바람은 몬순과 함께 오는 바람이다. 1월에는 아라비아나 인도에서 남쪽으로 바람이 불어 동부아프리카에 닿았으며, 6월에는 반대로 불었다. 반드시 바람의 주기가 일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다. 무역 상인들은 언제나 바람에 순응해 때를 기다려 목적지에 닿았다. 풍력을 이용한 다우선으로 아프리카는 아라비아, 인도 심지어 중국 등과 상호 교류했다.


서부 인도 해안의 무역상인도 당연히 몬순을 이용했다. 몸바사를 위시한 동부 아프리가 전역에서 무슬림 이외에 인도계 신전을 마주치는 일은 너무도 자주 있다. 콜람이나 코친, 고아, 뭄바이, 구자라트 등의 서부해안에서 인도양만 바로 건너면 아프리카다. 인도계가 이들 아프리카 해양세계와 교섭한 역사 역시 실로 천년을 뛰어넘는다. 몸바사나 잔지바르 같은 섬에도 시바신전이 있어 지금도 인도인이 모여드는 성소로 기능한다.

몸바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중국 도자기.

몸바사의 선박은 원시적인 통나무배, 아랍의 다우선 양식과 이중 카누 양식을 보여준다. 배 바깥으로 지지대가 뻗어나가 배를 안정적으로 지탱시키기도 하고, 커다란 이중 카누에서는 지지대에 화물을 싣기도 한다. 이러한 선박 양식은 스리랑카나 인도네시아, 태평양의 원해 항해에서 많이 확인되는데 이번 탐사에서 아프리카에서도 확인되었다. 선박 양식은 마구잡이로 전승되지 않는다. 인도양을 가운데 두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항해적 공통점과 교류의 가능성이 강하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동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선주민이 아프리카인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인도양을 넘어온 말레이계라는 사실, 보르부드르 사원의 부조에 대항해용 이중 카누 선박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사구호 ‘인도양을 넘어 대서양으로’]
지저스 성채에 마련된 박물관에 들어서니 무슬림도자기와 중국도자기 심지어 지중해도자기까지 엿보인다. 중국도자기는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급 자기들이 수입명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당·원·송·명·청 등 모든 시기의 명품 자기가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이는 천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이들 스와힐리 해변으로 중국과 문명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결정적 증거다. 정화원정대가 동부아프리카를 최종 목적지로 하여 원정을 감행한 사실은 너무도 알려진 사실이라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몸바사에서 목격한 철도공사 현장은 중국 정화의 실크로드 대항해가 이제 ‘일대일로(一帶一路)’로 다시 꽃을 피워 아프리카 내륙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이로비에 들러 철도박물관을 찾았다. 중국자본이 몸바사-나이로비-우간다에 이르는 철도 현대화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빅토리아 호수를 넘어서 대서양으로 향하는 철길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제국영국이 아프리카 내륙의 자원을 빼돌리고 인도양과 소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만든 우간다-나이로비-몸바사 철도가 일대일로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들의 공사 구호는 ‘인도양을 넘어 대서양으로!’다. 인도양을 달려온 중국 일대일로의 글로벌 전략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일본 천리대학 박물관에는 우리가 제작한 현존 최고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지도(1402)가 소장되어 있다. 지도 제작의 한국독자성을 주장하기 이전에 이 지도가 원의 세계지배기에 완성된 세계지도에 영향 받았음을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팍스 몽골’ 체제에는 아프리카도 들어와 있기에 지도의 아프리카 도면에 유독 빅토리아 호수가 축적과 무관하게 크게 부각되어 있다. 의문이 풀린다. 인도양을 가로질러 몸바사 등 동부아프리카의 항구에 닿으면 캐러밴 루트를 이용하여 빅토리아 호수에 닿고, 호수에서 배를 이용하여 건너편에 닿으면, 다시 캐러밴 루트를 이용하여 인도양에 닿은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빅토리아 호수만 아프리카 중앙에 거창하게 그려냈음은 중국에서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에 당도하고, 전통적 캐러밴 루트로 호수까지 닿았던 역사적 궤적을 증명하는 것이다. 호수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전통적 교통로는 적어도 수천 년 이상 이어져온 장기지속의 결과물이다.


그 루트를 영국이 철도를 부설해 세계경영에 활용했으며, 이제 다시 중국의 자본이 그 길을 역으로 거슬러가는 중이다. 정화 이래 오래 기다렸던 그네들의 원대한 ‘해양굴기’가 이곳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식의 일대일로로 ‘중국몽’을 꽃피우고 있다. 한국은 인도양 전략의 요충지인 아프리카 동부에서 지금 무얼 하는가. 고작 아프리카에 맞지도 않는 코리아 푸드를 지원하거나 춤과 노래가 몸에 배인 그들에게 ‘한류 가무’를 선사하려는 무모한 일이나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