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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법 개정안 논쟁의 핵심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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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14면

“주주가 기업을 소유한다.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많이 내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1970년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주주 자본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글이었다. 당시는 ‘소유(주주)와 경영(전문경영인)의 분리’로 표현되는 관리 자본주의가 ‘노멀(Normal)’인 시대였다. 논쟁이 뜨거웠지만 프리드먼의 주장은 소수 의견에 가까웠다. 그러다 76년 반전의 계기가 되는 논문이 발표된다. 마이클 젠슨 하버드대 교수가 쓴 ‘기업의 이론:관리 행동, 대리인 비용 및 소유구조’다. 젠슨은 이 논문에서 왜 주주가 기업의 주인인지 설파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유일한 책무는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주주들은 이 논문에 매료됐고, 미국을 중심으로 주주 자본주의가 퍼져 나갔다. 이윽고 9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기업 지배구조 기본 원칙’을 발표했는데, 이는 주주 자본주의에 기반을 둔 영미식 모델이었다. 80~90년대 서구사회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이론적 대립에서 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기업 오너가 전횡하는 ‘황제 경영’ 소리를 듣던 한국 역시 OECD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세운 주주 자본주의 기반의 모델을 대거 수용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98년 외환위기 때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한국의 주주 자본주의는 본산인 미국과는 다르게 진화했다. 일반 주주보다는 기업 총수 일가 중심의 지배구조가 틀이 잡히며 세련돼졌다. 한국은 주주 자본주의가 아니라 ‘대주주 자본주의’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의 대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영미식 자본주의의 외피를 입어 겉은 영미식, 속은 오너 가족 지배의 동양식이라는 이상한 혼합 자본주의 형태를 띠게 됐다”고 분석했다.


장점은 있었다. 총수 중심의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취한 한국 기업에 적합했다. 한국 대기업은 크게 성장했고 국부를 키웠다. 그러나 동시에 반(反)기업 정서도 확산됐다.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과 불공정 행위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거수기 사외이사들로 채운 기업 이사회와 감사위원회는 견제와 감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라는 화두가 힘을 얻은 배경이다. 최근에는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이런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청와대의 겁박에 수백억원을 미르·K스포츠재단에 갖다 바친 19개 그룹, 53개 기업 중 기금 출연을 위해 이사회를 연 곳은 단 두 곳이었다(경제개혁연대). ‘주인 없는 회사’로 불리는 포스코와 KT다. 다른 대기업은 아무런 절차도 밟지 않고 흔적도 없이 수십, 수백억원을 비선 실세에게 내줬다. 만약 대주주와 이사회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가능했던 일일까. 지난 6일 국회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불려 나온 9명의 대기업 총수는 우리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둘 것인가, 바꿀 것인가.

대기업들이 적법 절차 없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거액의 기금을 출연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총수 중심의 폐쇄적 지배구조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들(앞줄). 오종택 기자

[다중대표 소송제, 집중투표제 등도 계류]
흔히 기업을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기업의 운영 방식은 기본적으로 어떤 자본주의 체제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기업의 지배구조를 법으로 바꾸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고쳐 쓰는 것과 같다. 20대 국회에는 8일 현재 17건의 상법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이 중 10건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됐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집중투표제 의무화, 근로자를 대표하는 이사 선임, 자사주 관련 규제, 경영승계 규정 마련 등이다. 국회 통과 여부에 따라 기업 지배구조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폭발력 있는 법안이자, 대부분 10년 넘게 이어온 논쟁거리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도가 대표적이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이 각각 발의했다. 이 제도는 기업의 감사위원과 일반 이사를 따로 뽑자는 것이다. 이사회 감시와 견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개정안은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3% 이내로 제한하도록 했다. 쉽게 말하면 대주주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는 감사위원이 선출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겠다는 것이다. 찬반은 극명하게 갈린다. 반대 진영에서는 투기자본이 3% 이하로 지분을 쪼개는 방식으로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해 기업 이사회에 진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기에 김종인 의원이 발의한 집중투표제까지 의무화되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집중투표제는 1주 1표가 아니라 1주에 대해 선임하고자 하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명의 이사를 뽑을 때 1주를 가진 주주의 의결권은 3표가 된다. 이때 주주는 이사 후보 1명에게 3표를 몰아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소액주주나 투기자본이 뭉쳐 이사회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대주주의 이사 선임권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재산권과 경영권 침해”라며 “감사위원 분리 선출은 기업의 지배구조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신광식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는 “경영권은 누구에게도 빼앗기면 안 되는 절대적인 권한이 아니다”며 “그동안 실제 사례도 없는 이론만으로 반대를 하다 보니 기업 지배구조가 바뀐 게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감사위원 분리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부 총수 일가와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별법 통해 특정 영역 선별적 도입을”]
서울시가 12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근로자이사제와 같은 취지의 법안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김종인 의원이 발의한 상법개정안에는 우리사주조합이나 소액주주들이 추천한 각 1인을 사외이사에 선임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김 의원은 제안 이유에 대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측면”이라고 설명했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사외이사 중 1명은 근로자 대표가 추천한 인물로 선임하도록 하는 법안을 냈다. 독일처럼 근로자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고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이 역시 이견이 팽팽하다. 최정표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건국대 교수)는 지난 2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기업 내부에 독립된 감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해관계자를 대표하는 이사를 참여시키면 총수의 부당한 압력이나 사익 추구 행위는 제재를 받고 경영은 투명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강병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은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통해 사외이사가 선임되는 점에 비춰 보면 개정안은 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했다.


중재안도 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일반법인 상법에 도입하는 것은 무리”라며 “특별법을 통해 공공부문 등 특정 영역에 선별적·점진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종인·채이배 의원이 발의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도 논란거리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의 지분 1% 이상을 가진 주주들이 자회사나 손자회사의 부실경영이 있을 때 자회사·손자회사의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계열사가 무리한 부동산 투자를 하고 이 과정에서 모회사가 피해를 보면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물을 수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찬성 진영에선 이 법안이 주주의 적극적인 방어권을 보장하고 경영진에 대한 외부 견제를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최정표 교수는 “기업 밖에서도 경영자를 감시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며 “다중대표소송을 허용하면 기업 총수는 경영권을 남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경영권 침해와 자회사 주주의 권리 침해를 우려한다. 또한 일부 주주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소를 악용할 우려가 있고, 경영권을 빼앗거나 단기 차익을 노린 투기자본에 의해 남용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선진국은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도입한 일본도 100% 자회사만을 대상으로 제한한다”며 “이 제도는 교각살우(矯角殺牛·소의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의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사주(회사가 보유한 자사 발행 주식) 관련 상법개정안도 쟁점 법안이다. ‘기업분할 시 자사주 배정 금지’(박용진 의원), ‘지주사 전환 시 자사주 의무 소각 또는 주주에게 배분’(이종걸 의원), ‘우호세력 확보 위한 자사주 제3자 매각 금지’(박영선 의원) 등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동안 대기업은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자사주를 활용해 손쉽게 지배력을 확보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기업 분할 시 자사주 배정 금지도 쟁점]
일반적으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는데 제3자에 매각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또한 회사가 분할될 경우 지주사가 보유한 자사주는 의결권이 있는 자회사 지분으로 전환돼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를 ‘자사주의 마술’이라고 한다. 이 개정안들을 두고도 재산권 침해라는 주장과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견해가 맞서 있다. 최고경영자의 승계와 관련된 내부 규정 마련(민병두 의원), 내부자 거래 승인 주체를 이사회에서 주주총회로 전환(이언주 의원), 전자투표제 단계적 의무화(김종인 의원) 등도 찬반이 크게 갈린다.


기업 지배구조를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진로를 정하는 첫 단추다. 이 때문에 반재벌 정서에 기대 밀어붙여서도, 기업 부담을 운운하며 무조건 반대해서도 곤란하다. 지금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고쳐갈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상법 개정은 그 과정의 하나다. 이는 대기업 총수 일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소액주주는 물론 노동자, 채권단, 나아가 모든 이해관계자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시민사회의 관심과 참여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 정치 체제의 변화를 염원하는 것처럼 법안이 여러 절차를 밟을 때마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사회가 조금 더 나은 자본주의와 만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19년 전처럼 IMF의 강권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말이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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