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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내가 책임” 2004년 이헌재 같은 사령탑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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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된 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긴급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유 부총리는 “경제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왼쪽은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사진 전민규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된 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긴급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유 부총리는 “경제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왼쪽은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사진 전민규 기자]

‘긴급 간부회의 소집→대국민 성명→임시 국무회의 참석→국제신용평가사에 협조 서신→금융기관장 회동→경제단체장 회동.’

경제 충격 최소화 할 대책은
당시 이 부총리, 한강 6차례 건너며
가결 당일 “불안 우려 없다” 메시지
대통령 직무 정지에도 경제 안정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2004년 3월 12일.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가 하루에 소화한 일정이다. 그는 이날 한강 다리를 여섯 번 건넜다. 숨 가쁜 일정을 통해 경제부총리가 나라 안팎에 던진 메시지는 간명했다. “경제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챙긴다.”

다음 날은 경제장관회의와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제에 불안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당시 재정경제부 국제업무정책관)은 “그때는 ‘설마 탄핵당할까’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금융시장이 의외의 결과로 받을 충격을 진화하는 게 급선무였다”면서 “신용평가사와 투자자들을 우선 접촉해 ‘우리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사회다.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한 건 그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이런 설득에 신용평가사들은 차례차례 “국가 신용등급을 낮추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에 대한 초유의 탄핵 의결에 동요하던 금융시장도 안정돼 갔다. ‘안보·행정-고건, 경제-이헌재’라는 투 톱의 안정감, 여기에 정부의 발 빠른 대응과 일관된 메시지가 힘을 발휘하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직무집행이 정지된 두 달간 경제는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대통령 탄핵 의결이 재연된 9일. 경제팀은 13년 전의 ‘교과서’대로 움직였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오후 9시 긴급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10일에는 관계기관 합동 비상경제대응반 회의, 경제 5단체장 간담회, 양대 노총 위원장 면담 등을 할 예정이다.

긴급 회의가 열리고 시장 안정용 메시지가 발표되는 등 외양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결과까지 같을지는 미지수다. 당시보다 훨씬 악조건이어서다. 2004년과 비교할 때 무엇보다 큰 차이는 경제를 책임질 사령탑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 부총리는 ‘최순실 게이트’가 확산하던 지난달 2일 교체 통보를 받으며 리더십에 상처가 난 상황이다. 후임으로 청와대가 지목했던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이후 청문회 일정 등이 진행되지 않으며 거취는 안갯속이다. 권태신 원장은 “중심을 지킬 사람이 없으니 시장은 물론 흔들리는 공직사회를 다독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충격에 맞설 경제의 ‘맷집’ 역시 약해진 상태다. 2~3년째 이어진 저(低)성장에다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닥치면서 가계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를 접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4분기 성장률이 ‘0%’를 기록하고, 내년에도 경제가 기껏해야 2.4% 성장하는 데 그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여기에 정치 불안이 지속될 경우 2% 초반, 중국의 경기 급락 등 대외 충격이 올 경우는 1%대로 내려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경고가 덧붙었다. 국정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과감하고 선제적인 대책을 검토할 시점이다. 하지만 정부는 불확실한 정국의 추이만 지켜보며 애만 태우고 있다.

당시보다 나은 건 국가신용등급(AA등급)이 상징하는 대외 신인도다. 하지만 나라 밖 사정이 2004년과 달리 ‘폭풍 전야’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권 출범을 앞두고 보호무역주의 우려가 커지는 데다, 중국까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등을 문제 삼아 노골적인 통상보복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달 말 미국의 금리 인상이 현실화하면 금융시장이 들썩일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 경기의 경착륙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문제에 방파제 역할을 할 한·일 통화스와프 체결 협상 등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세계 경제가 기침을 하면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처럼 경제 체력과 정책 동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충격이 닥치면 자칫 회복이 어려운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탄핵 결정 이후에도 정치적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향후 관건은 그 파장을 얼마나 최소화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경제사령탑부터 확실히 세우는 것이란 게 경제 원로와 전문가들의 일치된 조언이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여야가 합심해 경제 ‘컨트롤타워’를 구축, 위기 관리를 일임하는 등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 탄핵 정국 속에서도 정부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시장과 나라 밖에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내년 경제정책 방향 발표 등 주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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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위기를 극복해 온 주요 동력이었던 공직사회에 다시 한번 소명의식을 발휘해 달라는 당부도 이어진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한은의 업무는 전과 다름없이 이뤄졌다”면서 “상황이 엄중할수록 공직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업무를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글=조민근·조현숙·하남현 기자 jming@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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