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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5)] 최현, 숨겨진 김정일 킹메이커(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정일 조직비서동지께서 건강하시오?”

최현 인민무력부장이 1982년 사망할 즈음에 병상에서 그를 문병 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에 기록돼 있다. ‘김정일 바라기’였던 최현은 자신이 ‘강추’했던 김정일이 후계자로 잘 성장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노동신문에 게재된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부고. [사진 노동신문]

노동신문에 게재된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부고. [사진 노동신문]

김정일은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임명됐다. 김정일의 후계 수업은 사실상 1973년 조직비서를 맡으면서 시작했다. 이에 앞서 후계자 논의는 1971년 11월 당 제5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김일성이 제지하면서 일단 보류됐다. 시기상조와 혈연적 연계에 따른 심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한 듯하다.

최용건 전 민족보위상, 김영주(김일성 동생) 당 조직비서, 김일 당 비서 등이 1972년 6월 정치위원회에서 재차 김일성에게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김일성은 김정일이 서른 살 밖에 되지 않았다고 계속 반대 이유를 밝히고 다른 사람을 찾아 볼 것을 주문했다. 항일 원로들은 김일성이 김평일에게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의 결심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미적거리는 김일성을 찾아 가 이를 뒤엎은 사람이 최현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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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의 ‘무데뽀’ 덕인지 김정일은 마침내 1973년에 개최된 당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지도부장 겸 조직비서, 선전선동부장 겸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로써 공식추대 이전에 후계자의 자리에 올라섰고 1974년 2월에 열린 당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됐다.

최현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인민무력부장을 맡는 동안 가장 큰 업적이라면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든 것이다. 최현이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던 때는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를 다져 갔던 시기로 북한군에 변화가 없었던 시기였다. 아울러 7.4 남북공동성명(1972년)이 발표되는 등 데탕트 무드가 한반도에 조성돼 남북한에 군사적인 긴장 상태가 없었다. 최현은 1976년 5월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준 뒤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정치국 위원과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2년 뒤 사망했다.

영화 ‘혁명가’에서도 그려졌듯이 최현은 삼국지 장비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인간적이고 의협심이 강하며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탈북민 가운데 최현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이다. 김일성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최현을 최대한으로 미화했다. 최현은 군사뿐 아니라 정치에도 밝은 지휘관이었고, 유능한 군사작전가· 노숙한 정치일꾼· 세련된 선동가였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최현을 싸움꾼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근시안적인 평가라고 덧붙였다.

김일성(사진 중앙) 등 북한 지도부들이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종옥, 김정일, 오진우, 김일성, 김일, 김영남 [사진 노동신문]

김일성(사진 중앙) 등 북한 지도부들이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종옥, 김정일, 오진우, 김일성, 김일, 김영남 [사진 노동신문]

최현이 사망한 뒤 노동신문에 미스테리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노동신문은 1982년 4월 11일자 4면에 최현의 시신 앞에 김일성 등 주요 간부들이 애도를 표시하면서 머리를 숙인 장면을 게재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김일, 오진우, 김정일, 이종옥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배석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장면은 김정일만이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존경이 사무쳐서인지 섭섭한 점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기 어려워 궁금증이 남는 대목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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