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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재생하는 기하학적 오브제…스피커를 갤러리서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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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메탈스피커 디자이너 유국일

스피커 디자이너 유국일은 지금까지 총 20종의 스피커를 디자인했다. 한 작품당 5~7개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있던 것을 계속 조립해 돈 버는 것보다 새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스피커 디자이너 유국일은 지금까지 총 20종의 스피커를 디자인했다. 한 작품당 5~7개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있던 것을 계속 조립해 돈 버는 것보다 새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3년간 소리에 미쳐 살았다. 그것도 음반에 녹음된 소리를 라이브처럼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꽂혔다. 비행기 동체를 만드는데 쓰이는 ‘두랄루민’으로 한 대에 150㎏이 넘는 무거운 스피커를 만든다. 진동을 줄여 더 정확한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관련 기술 및 디자인 특허만 40개가 넘는다. ‘레드닷’ ‘IF’ 등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14번 수상했다. 서울 성동구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유국일의 메탈스피커: 원음 그대로’ 전시를 하고 있는 메탈사운드디자인 유국일 대표(51)의 이야기다.

금속 스피커 ‘혜성’

금속 스피커 ‘혜성’

지난 1일 그의 서울 성북동 작업실 한 편에 석상처럼 서 있는, 1m가 넘는 높이의 스피커를 켰을 때다. 매끄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금속 스피커 ‘혜성’에서 키스 자렛의 재즈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소리가 스피커에서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묘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마치 객석에 앉아 스피커가 오브제로 놓여진 무대 위 공연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유 대표는 스피커 디자이너라기보다 ‘라이브 소환술사’에 가까운 듯했다.

더페이지서 ‘원음 그대로’전
앞에서 연주하는 듯 생생한 사운드
한 대에 수억원, 중국 부호들 단골

“이게 안 되면 미칩니다. 음악을 틀면 내 앞에서 연주자가 연주를 해야 해요. 소리와 디자인, 둘 다 잡으려고 사력을 다했죠.”

지금은 중국의 부호들이 직접 와서 억대에 달하는 그의 스피커를 사간다지만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1993년 홍익대 금속공예과를 졸업한 유 대표가 스피커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차가웠다. “지금의 아내 빼고 모든 사람이 반대했어요. 너무 생소한 길이었거든요. 유명 브랜드의 스피커를 숱하게 해체해 봤어요. 수천만원짜리 스피커인데도 싸구려 부품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훗날 내 스피커를 누군가 뜯어봤을 때 절대 부끄럽지 않은 스피커를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2004년 세계 최고의 음향 유닛 업체인 독일 아큐톤사와 기술 협약을 맺은 게 유 대표의 오늘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스피커는 크게 인클로저(스피커 통), 유닛(통에 달린 진동판), 네트워크(전기회로)로 구성된다. 유닛은 스피커의 소리를 결정하는 핵심부품이다. 아큐톤의 경우 이탈리아 명차 ‘부가티’에 들어가는 스피커 유닛을 만드는 회사다.

그는 아큐톤과 협업하기 위해 2000년 독일에 갔다. 명함 한 장 들고 막무가내 찾아갔다. 독일어도 영어도 못하는 동양인이 값비싼 금속 스피커를 만들겠다 하니 바로 문전박대당했다. 5년에 걸쳐 집요하게 찾아갔다. “세계적인 유닛을 만들면서 돈 많이 든다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꿈을 외면하는 일이고 비겁한 짓”이라며 큰소리도 쳤다. 그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일갈했는데 아큐톤에서 ‘열정에 감복했다’며 계약을 맺어줬다”며 “독일은 통상 10년가량 알고 지내야 파트너를 맺는다”고 전했다.

스피커 하나에 들어가는 부품 만 800개에 달한다. 유 대표는 “이를 수작업으로 조립하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고 말했다. 그는 스피커 통을 디자인뿐 아니라, 복잡한 전기회로를 조정해 정확한 소리를 찾는 ‘튜닝’에도 능하다. 2013년부터 아이리버와 손잡고 개발한 고급 스피커 ‘아스텔 앤 컨(Astell & Kern)’의 음질도 수없는 튜닝의 결과다. 그는 “튜닝할 때는 한 20일간 틀어박혀 거의 굶다시피 하며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고 말했다. 소리에 집중하고, 라이브 현장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몸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미술평론가 김용대씨는 “그의 메탈 스피커는 작곡가의 시간과 듣는 이의 시간을 공유하게 하는 치밀한 재현성을 갖고 있다”며 “원음의 완벽한 재현을 위한 기하적인 단순함과 유기적인 형태로 재구성하는 일은 건축하는 과정과 비슷하며 그 결과는 하나의 미니멀적인 아트 오브제가 된다”고 설명했다.

‘플래닛’ ‘혜성’ ‘문’ 등 우주적인 작품명처럼 그의 스피커는 생김새도 튄다. 전형적인 네모반듯한 스피커와 다르다. 흘러내릴 듯한 곡선과 기하학적인 형태가 주를 이룬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남자 주인공 김주원(현빈 분)의 집 거실 구석에 놓여 있던 스피커 ‘플래닛’은 짧은 등장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유 대표는 “당시 김주원의 집으로 나왔던 알로에 마임 연수원이 실제 구입해, 현장에 놓여 있던 스피커인데 드라마 방영 이후 각 방송국에서 협찬 요구를 해서 애 먹었다”며 웃었다. 그에게 스피커는 사람과 같다. 잘 다루면 좋은 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다. 유국일의 스피커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린다.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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