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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이제 마지막 기회를 살려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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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결국 정치적 합의에 의한 난국 수습은 멀어지고 겨우 법적 절차에 의존하는 탄핵 가능성이 커졌다. 어차피 물러날 수밖에 없는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의사를 밝혔던 마당에서 정국의 주도권은 국회 다수를 점하고 있는 야당들에 있었다. 나는 이런 구도를 활용해 박 대통령이 형식적으로 나라의 ‘겉테’를 두르되 야당들이 국정의 ‘알속’을 차지하며 사태를 수습해 가는 것을 기대했었다. 그 절묘한 타협책이 국회추천총리안이었다. 그런데 야당들은 어찌 된 셈인지 이를 단숨에 거절하고 크게 환호받지도 못하면서 광장 시위에 기대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정국은 더욱 날카롭게 갈 것 같다.

어차피 탄핵이 되면 박 대통령은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탄핵 이후 야당들은 황교안 대행 체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촛불 민심’에만 기대려 할 것이며, 궁지에 몰린 여당 의원들은 황교안 대행 체제에 혹시나 하며 정치적 생존을 걸지 모른다. 다 불쌍하고 한심한 몰골들이다. 상소와 의병과 봉기와 데모가 아무리 세차게 있었어도 그것에 대응한 정치인들의 단합된 노력과 전략 부재에 따른 망국과 파국을 이미 우리는 경험했다. 그때 정치인들은 무슨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권력 다툼에만 빠져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난국이 정치적 타협과 합의로 극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는 바로 옆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 북한과 일본이 있다. 따라서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보수든 진보든 누가 집권해도 국내 갈등의 해결은 언제나 국정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바탕 위에서 도모해야 한다. 현재까지 정치인들은 다 미숙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리 나라 걱정을 앞세우는 국가원수일지라도 이 사태에 대한 더 솔직한 자세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야당들은 물러가겠다는 대통령을 합의된 절차에 따라 보내기 위해 국회에서 다수당으로서 합의 창출의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했다. 이것은 만신창이 대통령의 요구가 없었더라도 당연히 했어야 했던 기본 책무였다. 그러나 야당들은 ‘촛불 민심’을 들추며 대선 정치와 막말 매도에 매진했다. 정치권은 지금이라도 국회에서 밤낮으로 숙의하여 어차피 나가야만 하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안심하는 가운데 내보내도록 주선하고 조치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약 야당이 최순실 등의 국정 농단을 미리 알고 현 정권의 비리를 규탄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권력의 공작과 탄압으로 방해받아 오다가 이 사태로 번졌다면 야당의 일방적 몰아치기가 용납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세계 경제의 불황에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가 겹쳐 한국 경제는 누가 사령탑인지 몰라 조타수를 잃고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부디 국회의원들은 국회에 틀어박혀 한 몸으로 난국 수습 방안 찾기에 날밤을 새우기 바란다. 이것이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는 국민들의 참 바람임을 직시하기 바란다.

둘째, 우리의 정치는 어차피 행정부 중심 시대를 지나 국회 중심 시대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여야 정치인들은 부디 이 위기를 상호 인정과 협상의 기회로 살려 국회 주도의 국가 경영을 경험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 위기 속에서 주어진 기회도 못 살린다면, 우리는 언제 일방통행식 발목 잡기와 기 싸움의 구태를 버릴 수 있겠는가? 이도 못하면서 개헌을 한들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 행정부는 기능 부전에 빠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주변 강국들의 ‘냉혹한’ 국제 정치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우리가 내정 혼란으로 정신없을 때 미국 신행정부가 북한과 평화협상을 한다고 하면 어찌할 것이며, 근래에 체결된 위안부와 군사정보 관련 협정을 빌미로 ‘내정 간섭식’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일본 관리들의 행태는 또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그런 국가적 위험에 대비하고 집안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개헌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 정치는 개발 이후(post-development)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시민들의 기대와 욕구를 효율적으로 반영하고 조절하는 국회 중심 정치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인들은 먼저 이 위기에서 마땅히 합의 도출의 정치를 성사시켜 나라가 안정된 가운데 박 대통령이 퇴진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탄핵 정국의 혼미와 불확실성을 피하고 국정 중단 없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안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다시 담화를 발표하여 자신의 책임과 특검 수사 수용 의사, 그리고 퇴진 시기를 보다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동시에 거국중립내각의 구성과 국회추천총리안을 다시 제안하기 바란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정치인들에게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이해관계나 당파적 입장을 넘어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 줄 것을 마지막으로 간구하기 바란다. 만약 이러한 제안마저 정치적 합의와 단결에 이르는 정치인들의 겸손과 지혜를 얻어낼 수 없다면 이제 모든 정치 평론과 평화시위에 걸 수 있는 희망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부디 정치인들은 각자 모두 조금씩은 애국자임을 서로 인정하고 이 난국 수습에 매진할지어다.

정 윤 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