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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탄핵 열차 떠나지만 '질서있는 퇴임' 열어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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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주말 6차 광화문 시민집회의 핵심은 ‘시한부 하야’를 거부하고 ‘무조건 탄핵’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당장 새누리당 비박계는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기다려 보자는 태도에서 9일 탄핵안 표결에 무조건 참여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어제는 정진석 원내대표가 “4월퇴진·2선후퇴의 당론이 폐기됐다”고 선언했다. 정 원내대표는 탄핵안 표결에 새누리당 의원들의 자유투표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국회의 제1, 2, 3당이 모두 탄핵 외길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민주당 "대선일정 논의를" ··· 마음은 콩밭
탄핵 찬반 떠나 책임 있는 수습자세 필요
박 대통령, 권한포기·조기하야 선언해야

 광장의 감성을 의회의 이성이 거르고 조절하지 못하는 정치는 불행하다. 당장 탄핵안이 가결되면 정국은 ‘이러려고 탄핵안을 가결시켰나’라는 얘기가 나올지 모른다. 우선 박 대통령의 직무정지와 함께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라 외교·국방 등 외치와 각종 헌법기관 및 장차관 등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다. 황 총리는 차기 대선의 관리자로서 선거내각도 지휘하게 될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 건네받은 탄핵안을 최장 6개월간 심사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는 내년 8월까지 지속된다. 그동안 우리가 정치권이 박 대통령의 4월 하야에 합의해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을 관철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질서 있는 퇴진이 물 건너갈 경우 뼛속까지 박 대통령의 사람인 황교안 체제를 분노한 광장과 포퓰리즘에 젖은 야당이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박 대통령에 이어 황 총리까지 끌어내리는 일은 혁명적 상황을 조성해 헌정질서를 중단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야당도 잘 알고 있기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일각에선 황 권한대행 체제의 임기를 줄이기 위해 박 대통령을 직무중지 상태에서라도 자진 사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발상이다. 이는 파면 절차에 들어간 공무원에게 사표를 받겠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심지어 어제 민주당의 의원총회에선 여러 의원들이 “탄핵안 처리 이후 당내 대선 일정에 대해 논의하자”는 주장을 쏟아내 마음이 콩밭에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지난주보다 상황은 확실히 악화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다. 오늘내일 사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4월 퇴임과 권한 포기를 골자로 한 4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것이다. 이는 국회가 그를 탄핵하든 말든 박 대통령이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게 바쳐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새 총리를 추천하면 국정에서 손을 떼고 내년 4월에 깨끗하게 물러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탄핵 정국이 빚어낼 불확실성을 줄이는 마지막 애국심을 발휘하기 바란다. 행여 자기 연민에 빠진 표현은 금물이다. 어제 한광옥 비서실장은 국회 국정조사에서 “대통령이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충분히 의견을 듣고 있으며 곧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는데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출발하기 시작한 탄핵 열차와 함께 4월 퇴임의 두 갈래 길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