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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SUNDAY 사설

그래도 외교안보 시계는 돌아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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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 상태다. 사상 초유의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은 몇 주일째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6차 주말 집회가 열렸던 어제도 서울 170만 명 등 전국적으로 232만 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집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외교 무대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신고립주의’ 노선을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2017년 1월 20일)을 앞두고 백악관 참모와 내각 각료 등 인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트럼프는 한국 측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액을 올려주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극단적 발언까지 한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그의 공언이 실현된다면 주한미군을 북한 침략의 방패로 삼아온 우리로서는 방어 전략 자체를 새로 짜야 할 판이다.

이뿐 아니다. 트럼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역시 일방적으로 한국에 유리하게 돼 있다며 재협상 혹은 폐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물론 트럼프의 공약 중 논란이 많은 사안들은 수정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그의 공언대로 실현될 악몽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당선에 놀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대선 직후인 지난달 17일 뉴욕으로 날아가 트럼프와 회동하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인 것도 트럼프의 향후 대(對)아시아 정책의 불가측성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당선인과 만나 일본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비준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는 등 ‘TPP 존속 외교’를 펼쳤다.

반면 한국은 조태용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을 미국에 보내 트럼프 인수위원회 관계자들과 만난 게 전부다. 일본은 총리가 직접 트럼프 당선인을 만났는데 한국은 장관급도 안 되는 인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국정이 마비되다시피 하면서 나라의 근간인 외교안보마저 빈사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일본과의 외교관계도 중대한 변곡점에 와 있다. 한때 “최고의 밀월 관계”라던 한·중 관계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중국이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조치로 ‘한류 금지령’을 내리면서 화장품·K드라마 등 한류 상품의 중국 수출이 철퇴를 맞고 있다.

특히 중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키를 쥐고 있는 나라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 제재 결의도 중국의 철저한 이행이 담보돼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느 때보다 대중국 외교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국이 시계 제로의 상태에 빠지면서 갈피를 못 잡고 손을 놓고 있다.

오는 19, 20일께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중·일 정상회의는 우리 측 사정 때문에 일정과 의제를 잡지 못하고 있다. 당초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는 서먹해진 중국과의 관계를 완화하는 동시에 위안부 문제 등으로 앙금이 남아 있는 한·일 간 감정을 누그러뜨릴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었다. 또 북한의 핵 개발 문제 등 공통 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고 주변국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외교 무대가 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탄핵(9일 표결 예정)을 코앞에 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교 부재’ 사태에 빠진 것이다.

중차대한 외교안보 문제가 ‘국정 사령탑의 부재’로 속수무책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미증유의 난세일수록 누군가는 태풍 속에서 휘청거리는 대한민국호의 키를 굳건히 부여잡고 격랑을 헤쳐나가는 ‘선장’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명확한 정치 일정과 향후 국정운영 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책임총리 인선을 놓고 정파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한 달 넘게 국정공백을 방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정치권은 대통령 탄핵은 탄핵대로 밀고 나가되,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로드맵을 조속히 제시해야 하며, 이를 위한 여야 협상에 나서야 한다.

또한 국가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관료 집단도 애국심을 발휘해 행정 공백이나 국정 누수가 없도록 직무를 충실히 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