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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한국 언론의 판을 한번 뒤집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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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한국 언론이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참혹한 정보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기억될 것이다. 언론의 위풍당당한 전당(殿堂)을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미국 언론도 잘못 짚었다고 내게 말하지 말라. 미국의 엉성한 저널리즘은 미국의 문제다. 미국 주요 신문들은 계속 클린턴의 승리를 전망하는 기사를 썼다. 심지어는 그의 승리 시나리오가 보다 신빙성 있게 보이도록 클린턴에 투표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아니라 “클린턴이 승리할 확률은 92%”라는 식의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미국 주류 신문을 따라 하다 보니
힐러리가 승리할 줄 오판했다
한국 신문도 세계 1등 목표 삼고
해외에서 모범 찾지 않아야

이런 사정에 밝은 많은 미국인은 선거 기간 중에 노출된 미국 주요 매체들의 편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프로답지 않게 기자들은 기사 작성 전에 클린턴 캠프와 모종의 조율을 했으며 언론사들은 클린턴 캠프에 기부를 했다. 수개월 동안 클린턴에게 불리한 뉴스가 쏟아지자 많은 유권자가 그에 대한 신뢰를 접었다. 그러나 한국 매체는 주류 미국 매체의 잘못된 1면 머리기사 제목을 답습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미 대선이 결판난 줄 알았다.

한국 교육 수준은 세계 최상급이다. 수많은 한국 기자들은 영어 구사력이 지극히 뛰어나다. 하지만 한국 매체의 관행 때문에 이번 대선이 박빙이 될 수도 있다고 내다본 여러 저널·블로그·기사 등 깊이 있는 문헌을 살펴본 기자는 거의 없었다.

한국 특파원들이 미국 근로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면, 소수집단 사람들이 클린턴에게 냉담했으며 많은 백인이 트럼프에게 열광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특파원들이 젠체하는 워싱턴의 싱크탱크 행사에서 미국의 보통사람을 만날 일은 없다.

한국 기자들은 한국의 스마트폰이나 컨테이너 선박 제조업 종사자들과는 달리 세계 최고가 목표가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한국 신문들은 외국 뉴스 기관들이 제공하는 뉴스들을 신속하게 소화하고 요약하는 데 주력한다. 한국 고유의 시각으로 국내외 독자들에게 기사를 제공하는 것은 한국 신문사들의 목표가 아니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은 세계 저널리즘을 주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산을 명백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사람이 영어·중국어·일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말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있다. 한국은 매체 보도를 종종 뒤틀리게 만드는 제국주의 과거가 없기 때문에, 외국 콘텐트를 복제하는 게 아니라 한국 자신의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저널리즘 전통을 수립하는 데 아주 유리하다.

새로운 한국 저널리즘을 만드는 과정은 부분적으로 모든 격식과 예의의 포기를 요구한다. 특파원들은 외국의 힘 있는 사람과 원만한 친분이나 우호관계를 쌓기 위해 파견된 게 아니다. 특파원은 현상의 본질을 파고들기 위해 미국 정치인·관료·변호사들을 거칠고 집요한 질문으로 다뤄야 한다. 기자들은 또한 사람들을 오도하기 위해 교활하게 작성된 권위 있는 어조의 기사들에 매혹되지 말아야 한다.

저널리스트는 다양한 출처의 글들을 읽은 후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야 한다.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하는 5개 혹은 6개의 시나리오를 우선 상상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셜록 홈스가 한 것처럼 신중하게 사실(fact)을 검토해 가능성이 없는 시나리오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제거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이 진실에 근접하게 해준다. 자신의 상상력으로 가설을 세우지 않으면 이해관계자가 제시하는 시나리오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함정에 쉽게 빠지게 된다.

신문은 진리 추구를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 일반 독자들이 ‘정보에 기반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내리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의도에서다. 민주주의적 체제 내에서 정보기반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양 있는 대중을 형성하려면 매체의 역할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기자들은 복합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성을 독자들에게 창의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깊은 의무감을 느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미디어업계는 질 낮은 레드오션 시장이 돼 버렸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이 그런 안개 같은 상황을 빨리 탈피할수록 한국은 더 빨리 자신의 국가이익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글로벌 리더로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독자들이 어떤 사안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 주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사들을 꺼릴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글쓰기가 대중을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적인 시민으로 변모시켜 그들을 책임성 있는 정치로 다시 인도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은 심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힘을 합치고 정보에 기반한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금 한국은 매우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에 대한 깊은 헌신이 필요한 때다. 언론의 모범은 해외에서 찾지 말자.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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