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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81년 묵은 극장, 그림을 품은 시장…빛고을은 문화고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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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가 K와 떠나는 광주 역사문화기행

아시아문화전당은 땅을 파고 들어가 있다. 대신 현대식 디자인으로 역사 현장을 새로 해석했다.

아시아문화전당은 땅을 파고 들어가 있다. 대신 현대식 디자인으로 역사 현장을 새로 해석했다.

구보 박태원(1909∼86)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1930년대 서울의 하루를 시종 비아냥대며 묘사했다. 평론가 김형중(48)의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도 내내 투덜거리기는 마찬가지다. K는 스스로 염세적이라고 고백했지만, 염세적이라기보다는 냉소적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워 보인다. 그래도 괜찮다. 본래 예술은 삐딱한 시선에서 비롯되게 마련이다. K와 함께 광주 구도심으로 통하는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를 돌아다녔다.

옛날 극장을 보러가다 - 광주극장

광주극장 정면 모습. 낡은 콘크리트 건물.

광주극장 정면 모습. 낡은 콘크리트 건물.

비 오는 월요일 광주극장 앞에서 K와 만났다. 헐벗은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K는 오래된 풍경처럼 서 있었다. 철거를 앞둔 건물처럼 광주극장은 추레한 꼴이었다. 디지털 시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람이 손수 그린 간판이 극장 앞에 걸려 있었지만 건물에 비해 간판이 작아 되레 안쓰러웠다.

사람이 손으로 그린 영화간판.

광주극장에 있는 옛날 한국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간판.

광주극장은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영관은 아니어도 옛 모습이 남은 유일한 극장이어서 영화 매니어가 순례 삼아 방문하는 숨은 명소다. 광복 직후에는 김구 선생 강연회가 열렸고, 60∼70년대에는 이미자 · 배호 등 인기가수 리사이틀 무대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광주 유일의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독립영화제 · 여성영화제 등 각종 영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의외로 볼 거리가 쏠쏠하다. 옛날 영사기는 물론이고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옛날 영화 간판도 전시돼 있다.

광주극장은 크다. 복층으로 된 좌석은 모두 856석이나 된다.

광주극장은 크다. 복층으로 된 좌석은 모두 856석이나 된다.

광주극장은 크다.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전체 면적이 2264㎡(약 685평)에 이른다(현재 모습은 68년 화재로 극장이 불 탄 뒤 다시 지은 것이다. 원래는 수용인원이 1250명이었다). 복층 좌석은 모두 856석이나 된다. 그러나 대부분 비어 있다. 영화 1편 상영하면 고작 관객 10명 정도가 든단다. 극장을 운영하는 김형수(47) 이사가 “아무 자리나 앉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무릎 담요를 나눠준다.

K는 광주극장을 소개하며 ‘가망 없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했다. 그리고 광주의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방 드나들듯이 극장에서 모이고 극장을 돕는 사연을 들려줬다. 광주극장은 정기 후원회원의 활동에 크게 의지한다. 하루 평균 영화 5편을 상영한다. 어른 8000원. 062-224-5858.

거리의 기억 - 금남로와 충장로

옛 전남도청 건물 별관에서 내려다본 금남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5ㆍ18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상징물 전일빌딩이다.

옛 전남도청 건물 별관에서 내려다본 금남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5ㆍ18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상징물 전일빌딩이다.

광주는 거리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만큼 금남로가 던지는 사회적 파장이 크다. K는 금남로를 ‘광주에서 가장 장엄하고 무거운 지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금남로는 흔하디 흔한 차로다. 금융기관·관공서·언론사가 밀집한 약 3㎞ 길이의 왕복 6차선 대로(大路)다. 역사와 만났을 때 6차선 도로는 비로소 금남로가 된다. 이때의 금남로는 5·18 민주화운동의 성지다. 80년 5월 광주시민 80만 명 중 30만 명이 매일 이 도로로 나왔고 매일 도로가 끝나는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해 5월의 기억을 오월길(518road.518.org)이 잇고 있다. 모두 5개 코스의 오월길 중에서 6.7㎞ 길이의 오월인권길이 금남로를 통과한다. 금남로 3가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5·18을 증언하는 4217점의 기록과 3750점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기록물이 2011년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금남로가 역사의 현장이라면 바로 옆 충장로는 일상의 영역이다. 광주광역시청이 상무지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충장로는 광주 최대의 번화가였다. 충장로에 돈과 사람이 모인 데는 까닭이 있다. 충장로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다. 고려시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상인이 거주했고 광복 이후에는 화교가 모여 살았다(지금도 충장로에는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집이 많다).

한때‘우다방’으로 불리던 광주 청춘의 만남의 광장.

한때 ‘우다방’으로 불리던 광주 청춘의 만남의 광장.

광주에서 “시내에서 보자”는 인사말은 아직도 충장로에서 만나자는 뜻이고, 충장로 2가의 광주우체국(충장로우체국)은 최근까지 광주의 청춘 사이에서 “우다방”이라고 불렸다. 너도 나도 우체국 앞 계단에서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광주가 배출한 아이돌 스타들, 예를 들어 수지·승리·유노윤호 등이 말하는 광주의 추억도 대부분 충장로에서 벌어진 일이다. 왕년에 충장로깨나 다녔다는 중년의 K는 네온사인 현란한 오늘의 충장로에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삶을 사랑하라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일빌딩. 벽에 ‘LOVE LiFE’라고 쓰여 있다.

전일빌딩. 벽에 ‘LOVE LiFE’라고 쓰여 있다.

금남로가 끝나는 지점에 전남도청이 있다. 아니 있었다. 옛 전남도청 건물 일대는 지난해 11월 25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재탄생했다. 아시아문화전당에 입장하기 전 의례처럼 도청 앞 광장(5·18 민주광장)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오른쪽에 선 베이지색 10층 건물을 바라봤다. 전일빌딩. 1968년 세워진 이 낡은 건물은 온몸에 5·18을 새긴 또 하나의 증거다.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남은 건물에 세로 글씨로 ‘LOVE LiFE’라고 쓰여 있다. K는 이 문장을 ‘삶을 사랑하라’고 번역했다. 광장 시계탑에서 매일 오후 5시 18분이면 느리게 편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 차임벨 연주곡이 흘러나온다.

드디어 도청 앞에 섰다. 금남로를 가로막듯이 서 있는 도청 본관은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아시아문화전당은 본관 건물만 남기고 시설물의 90%를 지하에 설치했다. 그래서 모든 시설이 도청 건물을 우러르는 것처럼 보인다. 본관 왼쪽의 계단을 내려가야 본관 뒷마당 지하 25m까지 파고들어간 아시아문화전당의 전모가 드러난다. 면적 16만1237㎡로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복합문화공간은 건설비만 7000억 원이 들어갔다. 지하에 있다지만 답답한 느낌은 없다. 천장에 낸 유리창 70개를 통해 지하 4층까지 햇빛이 들어온다.

아시아문화전당의 대표 조형물 ‘빅토리’.

중국작가 왕두의 조형물 ‘브이’는 손가락 두 개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그러나 서 있는 각도에 따라 손가락 하나만 세운 것처럼 보인다. 평론가 K는 하늘을 향한 거대한 ‘*uck You’라고 해석했다.

아시아문화전당은 으리으리하다. 첨단시설을 자랑하는 대형 쇼핑센터 같다. 그래서 K는 불만이 많다. K는 이 현대식 건물이 광주와 겉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중국작가 왕두(王度·59)의 조형물 ‘빅토리’ 앞에서 그는 불온한 상상을 한다. 특정한 각도에서 보면 뼈만 남은 손가락이 만들어낸 승리의 브이(V) 자가 하늘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세운 것처럼 보인다고 우긴다. 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acc.go.kr)에서 관람 프로그램을 확인할 수 있다.

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뒤편에 있는 대나무정원.

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뒤편에 있는 대나무정원.

드디어 도청 앞에 섰다. 금남로를 가로막듯이 서 있는 도청 본관은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아시아문화전당은 본관 건물만 남기고 시설물의 90%를 지하에 설치했다. 그래서 모든 시설이 도청 건물을 우러르는 것처럼 보인다. 본관 왼쪽의 계단을 내려가야 본관 뒷마당 지하 25m까지 파고들어간 아시아문화전당의 전모가 드러난다. 면적 16만1237㎡로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복합문화공간은 건설비만 7000억 원이 들어갔다. 지하에 있다지만 답답한 느낌은 없다. 천장에 낸 유리창 70개를 통해 지하 4층까지 햇빛이 들어온다.

사람 냄새를 맡다 - 펭귄마을과 대인시장

양림동 펭귄마을 담벼락. 주민이 마을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쓰레기로 골목을 치장했다.

양림동 펭귄마을 담벼락. 주민이 마을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쓰레기로 골목을 치장했다.

금남로에서 살짝 비켜나 양림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모여 산 마을로 광주의 근대화가 시작된 현장이다. 2009년부터 예산 307억 원을 들여 근대역사문화마을 관광자원화 사업을 벌인 결과 지금은 명소로 거듭났다. 소문대로 양림동은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볼 거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K는 양림동 어귀에 들어서자 이내 시무룩해졌다.

양림동 펭귄마을 골목을 둘러보는 평론가 김형중.

양림동 펭귄마을 골목을 둘러보는 평론가 김형중.

“옛날 처가가 이 골목 끝에 있었어요. 장모님이 옛날 한옥을 팔기 무섭게 양림동이 싹 바뀌었지요. 아버지가 송정리 살림을 정리하니까 KTX 광주송정역이 들어섰고요.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미리 파셨는지….”

양림동 펭귄마을을 상징하는 깃발. 펭귄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에서 비롯됐다.

펭귄마을 주민들이 골목에 모여 윷놀이를 하고 있다.

 명색이 평론가이지만 K도 처분하자마자 치솟는 땅값 앞에서는 속이 시린 모양이었다. 추억을 파는 문화산업, 개발과 문화운동의 상관관계 등을 들먹이는 사이 눈앞의 골목이 갑자기 좁아졌다. 낡은 담벼락 모퉁이에서 ‘펭귄마을’이라고 쓰인 깃발이 휘날렸다.

펭귄마을은 마을을 떠난 주민이 내다버린 잡동사니로 골목을 꾸몄다.

펭귄마을은 마을을 떠난 주민이 내다버린 잡동사니로 골목을 꾸몄다.

양림동 근대역사문화마을이 양지라면 펭귄마을은 음지였다. 펭귄마을이라는 이름이 거동 불편한 동네 어르신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말문이 막혔다. 장식물이라고 골목에 부린 것은 죄 쓰레기였다. 마을이 재개발지구에 묶인 뒤 하나 둘 고향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벽시계·장난감 따위였다. 양림동과 달리 펭귄마을에는 예산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마을 주민의 표정은 티없이 맑았다.

젊은 예술가가 꾸민 대인시장 골목.

대인시장은 젊은 예술가가 꾸민 예술시장이다. 광주 출신 체조선수 양학선의 뜀틀 동작을 시장 담장에 그려놨다.
대인시장에서 파는 꽃무늬 고무신.

대인시장의 표정도 해맑았다. 2008년 광주비엔날레는 젊은 예술가가 대인시장을 예술시장으로 가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술가 100여 명이 상인 400여 명과 어울려 시장을 바꿨고, 지금은 광주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재래시장 중 하나가 됐다. 토요일 밤마다 문화행사로 들썩이는 시장에서 옛날 시외버스터미널이 옆에 있던 시절 홍등가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K 같은 광주 토박이 말고는 없는 듯했다.

여행정보

광주 구도심 여행은 KTX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호남선 KTX를 타고 광주송정역에서 내린 뒤 지하철을 타면 광주 구도심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문화의전당역은 아시아문화전당과 붙어있고, 남광주역에서 내리면 양림동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금남로 4가역 오른쪽에 대인시장이 있고 왼쪽에 광주극장이 있다. 광주는 음식문화의 고장이다. 광주에 1박2일 머무는 동안 광주극장 근처에 있는 영안반점(062-223-6098)에서 삼선짬뽕(8000원)을 먹었고, 조선대 근방 미미원(062-228-3101)에서 육전(150g 2만5000원)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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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임현동·손민호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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