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재 논설위원
광장의 정의만큼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 내가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얘기를 오늘 꺼내는 이유다. 그는 얼마 전 검찰 포토라인에 서서 “부끄럽고 참담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부끄러움과 참담함에 깔린 진실을 알았지만, 침묵했다. 혹여 서투르게 변호했다가 그가 검찰과 여론의 더 매운 칼날을 맞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지난주 그의 영장을 기각한 법원 판사에게까지 온갖 비난이 쏟아지는 걸 보고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최순실·박근혜 처단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진실은 외면해도 좋은가?
대통령 옆에 있었다고
모두 최순실 부역자인가
조원동은 일벌레였다. 20여 년 지켜본 그는 한결같았다. 지인과의 저녁 자리에서도 일 얘기라야 눈이 빛났다. 똑똑하기로 소문난 강봉균·권오규·이헌재 경제 부총리들이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하지만 제 앞가림엔 서툴렀다.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정무 능력만 있었어도 큰 자리 한번 했을 사람”이라며 혀를 찬다. 이런 평판은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는 윗사람에게 ‘노’라는 말을 잘 못한다. 불타는 얼음, 동그란 네모라도 만들어 대령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가끔은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해내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의 첫 세법 개정안이 그랬다. 세법 개정은 그 정부의 철학을 담는 행위다. 박근혜의 주문은 ‘증세 없는 복지’였다. 그는 연말정산 소득 공제를 세액 공제로 바꿨다. 세율은 손을 안 댔지만 사실상 부자증세를 통해 복지 재원을 마련한 묘수였다. ‘거위 깃털’ 발언으로 설화를 입어 사흘 만에 후퇴했지만 훗날 야당과 진보 언론까지 그의 세법 개정안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고 ‘예스맨’은 아니다. 잘못된 판단·지시엔 제 목소리를 냈다. 2013년 초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 임명을 적극 반대한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다. 산업은행이 조선·해운 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하는데 교수 출신에 미경험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조원동은 홍기택에게 먼저 “자진 사양하라”고 권유했다. 홍기택은 그의 경기고 선배로 몇 손가락에 꼽는 친한 사이였다. 홍기택이 그의 권유를 거절하고 대통령이 임명을 밀어붙이자 그는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왜 홍기택으론 안 되는지를 구구절절이 담았다. 하지만 결국 홍기택은 산은 회장에 임명됐다. 뒷일은 익히 알려진 바다.
정권 초기 나는 그가 지인과 저녁 식사 중 걸핏하면 수십 분씩 대통령과 통화하는 모습을 봤다. 통상임금 문제며 영종도 카지노 유치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도 그다. 대통령은 그와 통화한 대로 며칠 뒤 GM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통상임금 문제를 꺼냈다. 그러니 그는 대통령 뒤에 어른대는 최순실의 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직권남용 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최순실과는 관계없다. 그런데도 그는 ‘최순실 부역자’로 불리고 있다. 문제가 된 CJ 이미경 부회장 퇴진 압력설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화를 (내가) 한 게 아니라 CJ 쪽에서 걸어왔다. 대통령의 뜻을 그 전에 수차례 전달했다. 잘못하면 CJ가 다칠 것 같아서 중재에 나선 것이다. 그걸 녹음해 되레 청와대를 압박한 게 CJ다.”
CJ 측은 “협박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는 소문난 규제철폐, 기업 방임 주의자다. 그렇다고 기업의 팔을 한 번도 비틀어보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개발 독재, 관치본능, 상명하복…. 그 또래 많은 고위 관료들은 이런 관행에 여전히 젖어있다. 그가 나설 필요 없고 나서서도 안 될 CJ 일에 나선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의 지금 고통과 추락 역시 퇴행적 과거와 철저하게 단절하지 못한 인과일 수 있다. 바로 박정희 패러다임 말이다.
광장의 에너지는 사악한 모든 것을 부술 만큼 위력적이나 정교하지 않다.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도 휩쓸려 죽을 수 있다. 대통령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광장은, 모두에게 최순실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다. ‘닥치고최순실’에 돌과 옥이 함께 타고 있다. 옥은 건져야 한다. 그런데 조원동을 옥이라고 얘기해줄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