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조원동을 위한 변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논설위원

이정재 논설위원

광장의 정의만큼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 내가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얘기를 오늘 꺼내는 이유다. 그는 얼마 전 검찰 포토라인에 서서 “부끄럽고 참담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부끄러움과 참담함에 깔린 진실을 알았지만, 침묵했다. 혹여 서투르게 변호했다가 그가 검찰과 여론의 더 매운 칼날을 맞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지난주 그의 영장을 기각한 법원 판사에게까지 온갖 비난이 쏟아지는 걸 보고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최순실·박근혜 처단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진실은 외면해도 좋은가?

대통령 옆에 있었다고
모두 최순실 부역자인가

조원동은 일벌레였다. 20여 년 지켜본 그는 한결같았다. 지인과의 저녁 자리에서도 일 얘기라야 눈이 빛났다. 똑똑하기로 소문난 강봉균·권오규·이헌재 경제 부총리들이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하지만 제 앞가림엔 서툴렀다.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정무 능력만 있었어도 큰 자리 한번 했을 사람”이라며 혀를 찬다. 이런 평판은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는 윗사람에게 ‘노’라는 말을 잘 못한다. 불타는 얼음, 동그란 네모라도 만들어 대령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가끔은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해내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의 첫 세법 개정안이 그랬다. 세법 개정은 그 정부의 철학을 담는 행위다. 박근혜의 주문은 ‘증세 없는 복지’였다. 그는 연말정산 소득 공제를 세액 공제로 바꿨다. 세율은 손을 안 댔지만 사실상 부자증세를 통해 복지 재원을 마련한 묘수였다. ‘거위 깃털’ 발언으로 설화를 입어 사흘 만에 후퇴했지만 훗날 야당과 진보 언론까지 그의 세법 개정안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고 ‘예스맨’은 아니다. 잘못된 판단·지시엔 제 목소리를 냈다. 2013년 초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 임명을 적극 반대한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다. 산업은행이 조선·해운 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하는데 교수 출신에 미경험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조원동은 홍기택에게 먼저 “자진 사양하라”고 권유했다. 홍기택은 그의 경기고 선배로 몇 손가락에 꼽는 친한 사이였다. 홍기택이 그의 권유를 거절하고 대통령이 임명을 밀어붙이자 그는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왜 홍기택으론 안 되는지를 구구절절이 담았다. 하지만 결국 홍기택은 산은 회장에 임명됐다. 뒷일은 익히 알려진 바다.

정권 초기 나는 그가 지인과 저녁 식사 중 걸핏하면 수십 분씩 대통령과 통화하는 모습을 봤다. 통상임금 문제며 영종도 카지노 유치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도 그다. 대통령은 그와 통화한 대로 며칠 뒤 GM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통상임금 문제를 꺼냈다. 그러니 그는 대통령 뒤에 어른대는 최순실의 그림자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직권남용 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최순실과는 관계없다. 그런데도 그는 ‘최순실 부역자’로 불리고 있다. 문제가 된 CJ 이미경 부회장 퇴진 압력설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화를 (내가) 한 게 아니라 CJ 쪽에서 걸어왔다. 대통령의 뜻을 그 전에 수차례 전달했다. 잘못하면 CJ가 다칠 것 같아서 중재에 나선 것이다. 그걸 녹음해 되레 청와대를 압박한 게 CJ다.”

CJ 측은 “협박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는 소문난 규제철폐, 기업 방임 주의자다. 그렇다고 기업의 팔을 한 번도 비틀어보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개발 독재, 관치본능, 상명하복…. 그 또래 많은 고위 관료들은 이런 관행에 여전히 젖어있다. 그가 나설 필요 없고 나서서도 안 될 CJ 일에 나선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의 지금 고통과 추락 역시 퇴행적 과거와 철저하게 단절하지 못한 인과일 수 있다. 바로 박정희 패러다임 말이다.

광장의 에너지는 사악한 모든 것을 부술 만큼 위력적이나 정교하지 않다.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도 휩쓸려 죽을 수 있다. 대통령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광장은, 모두에게 최순실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다. ‘닥치고최순실’에 돌과 옥이 함께 타고 있다. 옥은 건져야 한다. 그런데 조원동을 옥이라고 얘기해줄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이정재 논설위원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