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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극복 4인방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한국 경제가 나라 안팎의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저성장 장기화에 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대외 파고까지 높아지면서다. 때맞춰 이른바 ‘경제위기 10년 주기설’도 빠르게 퍼진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내년에 또다른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면서다.

실제 경기는 빠르게 식고 있다. 30일 통계청에 따르면 생산ㆍ투자가 꽁꽁 얼어붙으면서 9~10월 전산업 생산은 두달째 전달 대비 마이너스 상태에 빠졌고, 반짝 회복되는 듯 했던 소비 역시 앞길이 불안하다. 제조업 가동률은 10월 기준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이래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금리인상 조짐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 미-중의 동시다발적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 대외 악재들도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제 2의 외환위기’ 우려가 높아지는 속에서 외환위기 극복의 핵심 역할을 했던 4명의 고위 관료들의 증언을 담은 책이 발간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는 30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코리안 미러클 4 :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발간보고회를 개최했다. ‘코리안 미러클’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가 한국 경제발전 과정에 주요 역할을 한 정책담당자의 육성을 통해 정책 수립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 발간하는 시리즈물이다.

책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경제 정책을 주도한 이규성,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진념 전 기획예산처 장관의 육성 증언을 토대로 집필됐다. 이들은 당시의 위기 극복 과정과 함께 외환위기가 현 한국 경제에 주는 교훈도 이야기 했다. 4인이 외환위기를 회고하며 우리 사회에 던진 공통된 메시지는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변화하고 개혁하지 않으면 변화를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좌초 위기를 맞은 박근혜 정부의 ‘4대 개혁’ , 혼선 속 산업 구조조정과 관련한 조언도 나왔다. 노동·공공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지속돼야 하지만 소통과 공감 없이는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이를 위해선 외환위기 때와 같이 ‘간명한 메시지와 구체적 실행계획’(진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던 이헌재 전 장관은 “시장이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땐 정부가 한발 앞서 선제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컨설팅 구조조정’식으로 정부가 한발 빼는 듯한 태도로는 제대로된 구조조정을 하기 어렵다는 지적으로 읽힌다. 위기 때일 수록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한결 같다. 강봉균 전 장관은 “주어진 권한과 책임내에서 소신있게 열심히, 그리고정직하게 일하라”고 당부했다. 이들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했다.

“위기 상황에선 정부가 나서야…정책 성공은 리더와 국민의 소통과 공감에 달려”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경제부총리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경제부총리. [중앙포토]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경제부총리. [중앙포토]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의 리더십이 부족해보인다. 리더십은 시장의 묵시적 인정이 필요하다. 리더십이 없으니 은행 책임자들의 행동이 조심스럽고, 은행들끼리 차별화가 안되고 똑같아지고 있다. 시장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는 정부가 한발 앞서 선제적으로 개입하면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선제적 개입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곁가지 피해는 각오해야 한다. 지금 대우조선해양 문제가 불거졌는데 정말 결단력이 있으면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털고 출자전환하고 자르 것 자르고, 분리해서 살릴 것 살리고 해야 한다. 정부의 책임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혼돈의 시대를 꿰뚫는 문제해결 능력은 리더와 국민의 경험적, 암묵적 지적 능력에서 나온다. 특히 암묵지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진다. 암묵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지식을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겨난 구성원들의 통합된 지적 능력이다. 이는 공감을 바탕으로 생긴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정책이 목표하는 큰 줄기에 공감하고 서로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어려운 과정이지만 이런 암묵지와 경험지를 쌓아가는 과정이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하다.

“개혁의 메시지는 간명하고 구체적이어야"

진념 전 기획예산처 장관·경제 부총리

진념 전 기획예산처 장관·경제 부총리. [중앙포토]

진념 전 기획예산처 장관·경제 부총리. [중앙포토]

우리 경제는 위기를 당하고, 그러면서도 이를 극복하는 의지를 발휘하며 성장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 위기 때처럼 극복 의지도 없고, 결기도 없는 것 같다. 우리 경제 사회가 역동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 큰 위기이자 문제라고 본다.

개혁을 할 때는 애매한 수사적 개혁바향은 충격도 없고 효과도, 실현가능성도 없다. 지금 정부가 4대 부문 개혁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실체가 무엇인가? 외환위기 때는 아주 간명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내보냈다. 그래서 국민들의 역량을 모아갔다. 그런데 지금은 담론만 있고 구체적 실천 계획이 없다. 자꾸 일을 벌리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집중적으로 선정해서 공략하고 거기에서 성과를 내보이는 것에 국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 대전제가 소통과 배려라는 큰 리더십이다.

우리가 변화해야 할 시기에 변화하지 못해 생긴 것이 혹독한 IMF 체제였다. 우리의 생존 전략은 변화와 혁신이고, 그 요체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을 어떻게 발탁하고, 그들에게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낼 충분한 권한과 책임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시 구조조정 작동 안해…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닥치지 않는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중앙포토]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중앙포토]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10년에 한번 정도 정부 주도으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상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여러가지 제도도 바꾸고 시스템도 구축했다. 그런데 실제 작동이 안되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구조조정을 게을리하다 위기가 오면 갑자기 경제위기가 왔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오랫동안 정비하지 않은 차를 몰고 가다 길거리에서 멈춰서자 이유없이 갑자기 멈춰섰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예방하지 못한 것이 쌓여서 경제위기에 직면하는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위기가 닥치지는 않는다. 구조조정은 끊임엇는 환경 변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기간을 정해놓고 움직였다가 멈췄다가 하는 단속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들이, 공직자들이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른바 NATO, 즉 ‘NO Action, Talk Only’라는 말이 회자되지 않는가. 말만 할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풍조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보면 외환위기 극복을 잘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시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단지 이제 좀 살만하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선진경제로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뤄나가야 한다. 그런점에서 “외환위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개혁은 대통령과 여당만으론 안돼…공무원, 소신 갖고 정직하게 일하라”

강봉균 전 경제수석·재정경제부 장관

강봉균 전 경제수석·재정경제부 장관. [중앙포토]

강봉균 전 경제수석·재정경제부 장관. [중앙포토]

공무원 조직이나 공공부문 종사자들은 새 정부가 탄생하면 항상 개혁대상으로 지목되면서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용두사미가 된 게 지금까지의 역사였다. 그 주된 이유는 정권을 쟁취한 세력들이 공조직을 압도할 만한 도덕성과 전문성, 비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노사개혁도 대통령의 의지와 여당의 뚝심만으로 해결되지 어려운 과제다. 일반 국민들의 공감과 여론형성층의 선도역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민 설득 노력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설득하는데 대기업 경영진들도 적극 나서야 한다. 청년 일자리가 대기업 노조의 미래이익에도 부합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도록 대기업 총수들과 경영진들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한 때다.

(후배 공무원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내에서 소신 있게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일하라는 당부를 전하고 싶다. 그러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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