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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이화여대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들려준 세 문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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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짙어질 무렵인 26일 오후 5시30분. 이화여대 체육관으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30분 후부터 시작될 체육과학부 교수와 학생 간의 간담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최순실(60)씨의 딸 정유라(20)씨에 대한 학교 측의 특혜 의혹이 불거진 후 처음 마련된 자리였다. 정씨는 지난해 승마특기생으로 이 학부에 입학했고 현재는 자퇴 절차를 밟고 있다.

간담회를 앞두고 100명 넘은 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섰다.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교수들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건설적인 대책을 내놓을 거라 내심 기대를 걸었다. “오늘 그동안 궁금했던 거 다 물어볼 거예요.” 한 학생이 벼른 듯 말했다.

1시간 30분 후, 간담회장을 나서는 학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시간 아깝다”거나 “이거 들으려고 왔나”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간담회에 참석했던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교수는 정씨의 전 지도교수인 함모 교수, 그리고 이번 사태와는 큰 관련이 없는 A교수 단 두 명이었다. 정유라 특혜를 총 지휘했다는 의혹을 받는 김경숙 신산업융합대학장은 물론 학사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되는 이원준 체육과학부장과 이경옥 교수, 정씨의 수시전형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승하 교수 등은 모두 불참했다. 시작부터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교수들이 90분가량 한 얘기도 ”미안하다“, ”말 못 한다, “기다려라” 세 문장으로 요약되는 수준이었다. 두 교수는 간담회 시작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린다”고 했지만 “수사를 받느라 불참한 교수님들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최근 나온 교육부 감사 결과는 말 그대로 조사한 것일 뿐,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선생님들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도 했다.

제자들은 반발 섞인 질문을 쏟아냈다. 사상 처음으로 검찰이 학교를 압수수색하고, 교수들을 대거 소환 조사하는 등 이화여대란 이름이 하루도 빼지 않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는 왜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려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당장 학생들은 학기말과 졸업을 앞두고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적잖은 피해를 입던 터였다. 두 교수는 “정유라 학생이 한 번도 학교에 나오지 않고 학점을 받아간 것에 대해 교수들 모두 학사가 부실하게 관리된 점을 인정했고 많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교수들은 쏟아지는 질문에 “선생님들도 여기저기 불려 나가 조사를 받느라 힘들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일관했다. 나아가 “요즘 나오는 이화여대 관련 기사의 3분의 2는 소설이다. 100% 믿으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나마 ‘뉴스’라고 할 만한 것은 2018년도부터 체육특기생 제도를 운영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는 소식 정도였다. 그러나 추후 확인 결과 학교 측은 “아직 검토된 바 없다”고 했다. 최근 학생들 사이에는 체육과학부 교수들이 모여 ‘폐과(閉科)’ 논의를 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이에 대해 교수들은 “과가 최악의 상태가 되지 않는 한 폐과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입학 정원 축소는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90분 내내 겉돌기만 한 간담회는 이렇게 끝났다.

“정유라 사태로 우리가 받은 상처와 피해는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하나요?”

간담회가 끝나고 한 학생은 거의 울먹이며 물었다. 스승의 비리 의혹으로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건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교수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이화여대의 모습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상식적인 행위로 허탈감과 자괴감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학생들이 듣고 싶은 건 “기다려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들이 알고 싶은 건 진실이었고, 기대하던 건 “책임지고 바로 잡겠다”는 교수들의 다짐이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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