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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연애담' 이현주 감독 & 배우 이상희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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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잠시라도 지루해 할까 안달하는 듯한 요즘 한국영화들 사이에서, 이현주(35)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연애담’(11월 17일 개봉)은 유난히 ‘느린 멜로’라 오히려 돋보인다.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는 20대 여성 윤주(이상희)와 지수(류선영). 사회에서 아직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그들의 사랑은 더디고 조심스럽다. “남녀 관계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찬찬히 그려야 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랐던 윤주가 용기 내어 자신을 알아 가는 일종의 성장담이기도 하고.” 이 감독의 말이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무는 덤덤한 일상 속에 ‘훅’ 하고 스며든 이 담담한 사랑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이 영화는 올해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차지했지만, 더 뜨거운 열기는 관객으로부터 나왔다. 11월 열린 ‘KAFA FILM 2016:넥스트 제너레이션’ 기획전까지 매진 행렬은 계속됐다(‘연애담’은 이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작품이다). 단편 ‘디스턴스’(2010) ‘바캉스’(2014)에서 꾸준히 여성들의 퀴어 멜로를 그려 온 이 감독과 ‘바캉스’에 이어 또다시 그의 페르소나가 된 배우 이상희. “친구여서 오히려 불발될 뻔했다”는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오롯이 연애의 감정만으로 뚝심 있게 빚어낸 멜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왼쪽부터) 이현주 감독, 이상희 배우, 사진=라희찬(STUDIO 706)

(왼쪽부터) 이현주 감독, 이상희 배우, 사진=라희찬(STUDIO 706)

원래 남녀의 이야기였다고.
이현주 감독 “처음에는 사랑이 아니라 우정에 관한 코미디였다. 그런데 쓰는 내내 뭔가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내가 지금 제일 관심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애하고 순식간에 빠져드는 기적 같은 일들이더라. 여성 퀴어 단편영화를 찍으며 배운 것과 느낀 것이 모여 장편영화까지 온 것 같다.”
다시 함께할 만큼 서로의 무엇에 끌렸나.
이상희 “다른 배우들의 오디션을 모두 본 후 나에게 제의가 들어왔다(웃음).”

이현주 감독 “윤주가 처음으로 여자를 좋아해 키스 정도 하고 넘어간다면, ‘고등학생 여자애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는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그 설레는 감정이 섹스로 이어지길 바랐다. 이상희는 표정 하나로 마음을 움직이는 섬세한 연기에 탁월한 배우다. 장편영화 출연 경험이 있어서 나를 잘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고. 그런데 ‘바캉스’에서 그가 레즈비언 역할을 맡지 않았나. ‘퀴어영화에 또다시 캐스팅하는 것이 이 친구한테 좋을까.’ 수많은 오디션을 진행하며, 내 마음을 테스트했던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을 만나 봤지만, ‘결국에는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상희 “어떤 시선으로, 어떤 정서를 담아낼지는 이 감독님께 틈틈이 들어 왔기에 이 영화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인지 아니까. 혹시라도 이 감독님이 나에게 출연 의사를 물어보면 빨리 대답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안받기도 전에 혼자 한 달을 고민했다. 이런 베드신도 처음이니까. 그래도 ‘만약 제안이 들어오면 한 번 해 보자’고 마음먹었는데, 어느 날 이 감독님이 ‘술 한잔 하자’고 하더라. 그로부터 며칠 뒤 출연을 결정했다.”

특별한 사건 없이 두 주인공의 감정을 좇으며 영화가 전개된다. ‘연애담’ 하면 예측되는 흐름이 있는 만큼,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컸을 텐데.
이현주 감독 “졸업 작품이고, 장편 데뷔작이기에 할 수 있는 ‘모험’이라 생각했다. 나의 지난날이나 지금의 내 무기력함을 건드리는 영화들이 있는데, ‘연애담’이 그렇게 마음을 훅 찌르는 영화이길 바랐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를 좋아한다. 내 영화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배우 류선영에게 ‘봄날은 간다’를 한번 보라고도 했다. 뻔하고 지루할 수 있는 느슨한 흐름을 이 영화의 스타일로 만들어 준 것은, 손진용 촬영감독과 배우들 덕분이다.”

이상희 “내가 출연하는 모든 장면의 감정에 관해, 이 감독님과 함께 세 번 정도 반복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도 촬영할 때 많이 헤맸다. 명확히 설레거나 창피한 순간은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장면은 어떤 연기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촬영하며 혼자 엄청 날이 서 있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것이 윤주에게 꼭 맞는 정서였던 것 같다. 윤주도 그런 감정이 처음이니까, 서투르기에 표현이 조금 다르게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굳이 이렇게 참아야 하느냐’고 내가 물을 때마다, 이 감독님이 인내를 발휘하며(웃음) ‘옛날옛날, 네가 서툴렀을 때의 첫사랑’ 얘기를 꺼냈다. 그렇게 돌이켜 보니, 고3 때의 일이 떠오르더라.”

영화 `연애담` 스틸컷

영화 `연애담` 스틸컷

극 전개에 의외의 긴장감이 있더라. 특히 첫 베드신 전에 주인공들의 성(性)적 취향을 드러내지 않아, 윤주와 지수의 만남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이현주 감독 “많은 퀴어영화가 동성애자끼리 모이는 장소를 묘사하면서, 극 초반에 주인공들의 성 정체성을 설명한다. 난 그냥 골목에서, 일상에 스미듯 사랑에 빠지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고 신선하다고 느꼈다. ‘연애’라는 게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려하지 않고 느닷없이 닥치지 않나.”
함께한 첫날 밤 섹스를 주저했던 윤주가 다음 날 아침 “하고 싶어”라고 쑥스럽게 고백할 때, 지수의 장난스러운 대답이 걸작이다. 류선영의 애드리브라고.
이상희 “그 장면 찍을 때 창피해서 없어져 버리고 싶었다. 아직도 그 베드신은 똑바로 못 보겠다(웃음).”
이현주 감독 “두 사람의 섹스가 그냥 취해서 하는 흔한 것이 아니라, 윤주와 지수의 ‘진짜 선택’이란 느낌을 주길 바랐다.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밝은 낮에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예쁘게 보여 주고 싶었다.”
윤주와 지수를 둘 다 ‘잉여 세대’로 설정한 이유는.
이현주 감독 “내가 제일 익숙한 지금, 여기, 우리 세대의 모습이니까. 지금 청춘들이 다 그런 것 같다. 사는 게 힘들고, 무언가 계속 준비해야 하고. 윤주가 연애와 더불어 자기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둘의 사랑을 잔인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친구가 잘 살기를 바랐다.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이상희 “윤주는 삶이 얼마나 힘들든, 한 번 더 사랑을 돌아볼 것 같다. 그런 아이니까.”

멜로 기근인 한국 영화계에 나타난 정공법 멜로여서 반가웠다. ‘퀴어영화의 기수’라는 꼬리표가 생겼는데.
이현주 감독 “관객이 ‘나도 저렇게 누군가를 좋아했지. 연애 때문에 아파한 적 있지’ 하면서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퀴어영화 감독’으로만 남지는 않겠지만, 동성애자 캐릭터는 계속 다룰 수도 있을 듯하다. ‘연애담’에 내가 아는 사랑의 감정을 담았다면, 차기작은 좀 더 복잡한 인간관계를 그려 보고 싶다. 빨리 다음 영화를 찍고 싶다.”
이상희, 사진=라희찬(STUDIO 706)

이상희, 사진=라희찬(STUDIO 706)

캐릭터와 가까워질 때 가장 행복한 이상희

이상희는 최근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여 주는 배우다. 2010년 연기를 시작해, 지금껏 장·단편을 합쳐 서른 편가량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에는 ‘철원기행’(4월 21일 개봉, 김대환 감독)도 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눈치 보는 며느리를 연기해, 제5회 사할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정작 그에게는 이런 수식어와 트로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제일 친한 친구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그 친구가 동기들과 함께 영화 만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다들 며칠씩 머리도 못 감은 채 작업에 매달리면서도, 눈빛만은 다들 반짝거리더라. 그 눈빛 으로 인해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그에게 연기란,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한다거나 황홀한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느끼는 감정을 극 중 상황에 맞게 카메라 앞에서 보여 주면 되는 거니까. 누군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것을 해 보여야 한다는 어색함은 깨야겠지만, 그건 누구나 깰 수 있다. 내게는 다른 스태프들, 영화를 창조하는 그들의 재능이 더욱 특별해 보인다.”

이상희의 연기는 남다른 개성으로 보는 이를 단번에 사로잡는 대신, 자연스럽게 관객의 눈과 입과 마음이 되어 극 전체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인물의 삶이 보이는 연기를 좋아한다. 배우가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야, 다른 인물의 삶도 그렇게 연기해 보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영화를 만든다는 것, 연기하는 과정은 대부분 힘들다. 그러다 문득, 그 캐릭터가 정말 내 곁에 가까이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배우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에게 ‘연기’란 결국 그 자신을 알아 가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감독들의 생각을 좀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독립영화를 계속하고 싶다. “너무 유명해지지 않으면서 좋은 작품을 계속하는 게 꿈이다. 누가 이 얘기를 듣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더라(웃음).”

지금껏 절망에 빠지거나 극단적 상황에 처하는 어두운 인물들을 주로 연기해 온 그는 “나와 닮은 역할을 아직 못 만났다”고 말한다. “직설적이고, 때론 욱하기도 하고, 털털한 편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한번 해 보고 싶다."

이현주 감독, 사진=라희찬(STUDIO 706)

이현주 감독, 사진=라희찬(STUDIO 706)

무기력한 시대, 일상의 공기를 담는 이현주 감독

2년 전,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제12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국내경쟁 부문 대상은 여성 감독의 퀴어영화에 돌아갔다. 바로 이현주 감독의 ‘바캉스’다. 시골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모님댁에 간 수영(이상희)을 애인 영미(강진아)가 쫓아오고, 수영은 동성애가 들통날까 전전긍긍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엄마는 간통 중이고, 아빠는 가장 구실을 못한다. 불같이 싸우던 가족이 계곡에 둘러앉은 엔딩까지, 이 영화는 “여성들의 연애담을 솔직하고 발랄하게 그렸다”는 평가 그대로다. 영미가 보채고 수영이 달래는 장면들에서 “흔히 보는 남녀의 연애가 연상됐다”고 하자, 이 감독은 반문했다.

“생각 외로 주위에 동성애자가 있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이미 ‘디스턴스’ ‘우리 결혼해요’(2007)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원거리 연애, 동성혼 등을 다룬 그는 당시 “한국 여성 퀴어영화는 남자들의 동성애를 다룬 퀴어영화에 비해 수도 적고, 현실적인 작품이 드물다”며 아쉬워했다.

장편 데뷔작 ‘연애담’에서 이 감독은 그 갈증을 고스란히 풀어냈다. ‘연애담’은 일상의 공기를 머금은 영화다. 애초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일인데, 주변에서 보면 ‘쟤도 연애하네’ 싶은 정도의 톤”을 염두에 뒀다. “다 아는 연애 이야기”인 만큼 이 감독 자신과 주변의 경험담을 버무려 “디테일한 에피소드에 신경 썼다”고 한다. 연애 초 달콤했던 담배 한 개비는, 훗날 예민한 상황에서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윤주가 혼자 컵라면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아귀찜을 놓고 지수와 어색하게 둘러앉은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작고 보잘것없는 옥탑 자취방, 허름한 골목 등 민낯 그대로 드러난 청춘의 공간들은 그 자체로 지금 시대를 증명한다. 이 감독 자신의 표현대로 “등장인물도 적고, 극적 사건도 없는 이 고전적인 멜로”가 어떤 관객에게는 격하게 공감되는 건 그런 이유다.

“(동일한 장르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 감독은, 차기작이 만약 또 멜로라면“내 인생 전부를 포기할 만큼 격한 감정을 그려 보고 싶다”고 했다. “사는 게 힘들수록 사랑을 해야지.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무기력한 시대를 조금 더 담게 될 듯하다.”

장성란·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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