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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흑인 노예 해방한 링컨의 공화당, 어떻게 ‘인종 차별’ 트럼프가 장악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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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공화당은 끝났군.”

미국 공화당 162년 ‘정치 역정’
헌법에 ‘모두 법 앞에 평등’ 넣어
흑인에게 투표권 주려 두 번 개헌
지금으론 상상 못할 ‘급진’ 성향

만년 공화당원 라이언 대븐포트는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자 혀를 끌끌 찼다. 노예해방을 이끌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당이 어쩌다 “멕시코인은 강간범”이라고 떠드는 부동산 재벌에게 넘어갔느냐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미국 정계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의 공화당이 어떻게 변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종차별적이고 보수적 당으로 가속화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지난 9일 대선 승리 직후 뉴욕에서 대국민 연설 중인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뉴욕 AP=뉴시스]

미국 정계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의 공화당이 어떻게 변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종차별적이고 보수적 당으로 가속화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지난 9일 대선 승리 직후 뉴욕에서 대국민 연설 중인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뉴욕 AP=뉴시스]

1854년 창당 후 링컨을 자신들의 첫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공화당은 162년간 어떻게 트럼프의 정당으로 변모한 걸까. 1850년대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신인 휘그(Whigs)당 양당 체제였다. 당시 민주당은 남부, 휘그당은 북부가 기반이었다. 면화산업 위주였던 남부는 노예제가 경제 근간이었고, 백인이 많고 기술이 발달한 북부는 노예제를 채택한 주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서부 개척이 계속되면서 노예제를 채택하는 주가 늘어나자 휘그당은 남부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노예제 주가 늘어날수록 상원과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다수를 차지해 민주당이 손쉽게 정치권력을 장악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1854년 노예제 문제로 분열한 휘그당은 쪼개졌고, 반(反)노예제를 기치로 한 개혁파가 공화당을 창당했다. 노예제 찬반 문제가 정치 쟁점화하면서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 지지자들에 힘입어 영향력을 키웠다. 1860년 정치적으로 거의 무명이던 링컨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처음으로 여당이 됐다.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의 반발로 남북전쟁이 촉발됐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은 1863년 마침내 미 전역의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당시 공화당은 지금의 공화당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은 모두 법 앞에 평등하며 피부색 때문에 투표를 못해선 안 된다는 조항을 넣기 위해 헌법을 두 번이나 수정했다. 지금은 상식적이지만 흑인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건 당시 혁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 개혁에 앞장섰던 공화당은 이내 보수화된다. 원래 남부보다 산업화가 앞섰던 북부는 남북전쟁을 거치며 부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부유한 금융가·기업가들이 공화당 지도부를 차지했다. 이들은 사회 개혁이나 정치 문제보다 경제적 이권 늘리기에 집중했다. 그래도 흑인들의 공화당 로열티는 1920년대까지 이어졌다. 1860년부터 1930년 초까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56년이나 미국을 다스렸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의 통치 기간은 16년에 불과했다.

그러다 1929년 대공황은 정치판을 크게 흔들었다. 대선에서 이긴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을 강화한 ‘뉴딜 정책’을 펴며 북부 공업지대 노동자와 흑인·이민자 등의 지지를 늘려갔다. 여기에 린든 존슨 대통령이 64년 모든 영역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한 민권법에 서명하며 공화당 지지세력의 한 축인 흑인들이 완전히 민주당으로 돌아섰다. 50년에 흑인 민주당원 숫자는 공화당의 배가 됐고 64년엔 80%에 육박했다.

이로써 공화·민주당의 정치 지형은 100여 년 만에 완전히 뒤바뀌었다. 남부 백인 보수주의자를 오랫동안 대변했던 민주당이 흑인·노동자·이민자·농부 등을 대변하는 당으로 옮겨갔다.

민주당의 탈바꿈에 오갈 데 없어진 남부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마음을 파고든 게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그는 기독교 복음주의, 애국주의 등 전통적 가치를 지키겠다며 이들의 지지를 얻어갔다. 공화당은 80년대를 거치며 친기업적이고 보수적인 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2000년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대 들어선 네오콘(신보수주의) 세력까지 가세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불량국가’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8년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공화당에 티파티 세력이 새롭게 등장했다. 증세, 건강보험 개혁 등 큰 정부를 지향하는 오바마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보수 강경파였다. 이들은 2010년 중간선거 때 대거 의회에 입성했다.

요약하면 공화당은 노예해방을 이끈 뒤론 줄곧 친기업(자본)-기독교 복음주의 정책을 유지하면서 보수 강경파(네오콘·티파티)를 아우르는 당으로 변모해왔다. 지금도 이들 3대 축이 지지기반이다.

하지만 공화당은 미국 내 인구 구성 변화를 등한시했다. 최근 10년간 미국엔 합법·불법적 이민자를 포함해 히스패닉 인구가 크게 늘었다. 히스패닉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게 중요해졌다. 오바마가 두 차례나 대선에 성공한 것도 민주당에 표를 몰아준 히스패닉 유권자의 공이 컸다.

공화당은 뒤늦게 히스패닉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2013년 1000만 명이 넘는 불법 이민자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이민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이는 공화당 티파티 당원들이 공화당 지도부와 엘리트 정치인에 등을 돌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틈을 파고든 게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고 극단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공화당 지도부 등은 히스패닉 유권자와 전통 지지층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있다가 양쪽에게 신뢰를 잃은 셈이다. 결국 젭 부시나 마코 루비오, 테드 크루즈 등 공화당 대표 경선 주자들이 모두 ‘아웃사이더’ 트럼프에 나가떨어졌다.

히스패닉의 인구 변화에 따른 민심의 변화를 못 읽은 건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던 저소득 노동자들(주로 백인)도 불법 이민자에 빼앗긴 일자리를 다시 찾아오겠다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미 언론들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공화당의 정체성이 어떻게 바뀔지 우려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무슬림 입국 금지, 불법 이민자 추방 등 트럼프의 공약처럼 인종차별적이고 백인 위주의 더 보수적인 당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뉴욕타임스는 “링컨과 아이젠하워, 레이건 대통령 등 위대한 미국 대통령을 배출하고 빛나는 업적을 남긴 공화당이 이제 멸종할 수도 있겠다”고 비꼬기도 했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보호무역주의도 오랜 기간 자유무역을 지지해 온 공화당의 입장에 반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공약 수정을 시사하거나, 내각 인선에서 여성·유색인종·정적 등을 배려하면서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제프 로 선거전략가는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서 “우려보단 당 지지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측면도 있다. 민주당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서민·중산층을 공화당이 흡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화당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상·하원까지 압승하면서 정치적 빚을 지게 됐다. 당장 공화당이 분파하거나 분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추후 통상정책 등에서 갈등을 빚겠지만 트럼프와 타협해갈 것으로 본다. 이에 따라 공화당 세력도 재편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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